눈을 떴다. 창문을 가려놓은 두터운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 시계를 본다. 아, 또 낮 2시다. 오늘도 학교 가기 미션은 실패구나.
A(16) 군의 하루는 보통 이렇게 오후 늦게야 시작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매일 저녁 무렵부터 새벽 3~4시까지 동네 형들과 어울려 놀기 때문이다.
학교를 가기 싫은 건 아니다. 학교에 가면 오히려 친구들도 만나고 밥도 해결된다. 하지만 등교 시간에 맞춰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다. 눈 뜨고 문지방을 넘는데 30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대낮이다.
그렇게 하루 이틀 학교를 빠지다보니 상습 결석생이 됐다. 결석에는 이제 무감각해졌다.
밖이 어둑어둑해지고 배가 슬슬 고파올 저녁 시간. 지금쯤이면 늘 모이는 그 골목에 대여섯 명쯤 모여들 때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진짜 '하루'를 시작하러 나가본다.
◈어른들의 '퇴근' 시간이 학교 밖 아이들의 '출근' 시간
밤은 비행(非行)을 저지르는 촉법소년들이 자유롭게 비행(飛行)할 수 있는 일종의 '해방구'다.
A 군이 '주면야행'(晝眠夜行) 생활을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당시 촉법소년 연령이었던 A 군은 동네 형들과 어울리는 데 맛을 들인 뒤 밤마다 PC방에 가거나 오토바이를 탔다. 하지만 놀자면 돈이 필요했다. 집에서 돈을 얻을 수 없으니 친구들에게 빼앗았다. 오토바이는 거의 훔쳤다.
그리고 5년여 흐른 지금, 촉법소년 나이를 넘겼음에도 이미 버릇처럼 당연해진 범죄로 인해 소년원을 들락거리게 됐다.
일찌감치 어른들의 관리망을 벗어나는 아이들은 가출과 탈(脫)학교를 겪으며 더 강도 높은 범죄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B(15) 군은 초등학생 시절 또래 친구들을 으슥한 곳으로 데려간 뒤 가위로 위협하며 "내 앞에서 성적인 행동을 해보라"고 강요했다. B 군이 또래 사이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사건은 유야무야 지나갔지만 나중에서야 소문이 돌았다.
전교회장까지 지냈다가 소위 '가출팸'에 들어가 성매매를 시작한 C 양도 당시 초등학생에 불과했다. 모범생이던 소녀는 또래 남학생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하다가, 남학생이 소문을 내는 바람에 충격을 받고 가출했다.
경찰에 붙잡히거나 소년원에 다녀와도 다시 '가출팸'으로 돌아가는 게 아이들의 특징이란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어른들보다도 나를 잘 이해해주는 '가족'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한영선 서울소년원장은 "가출팸이라는 단어부터 쓰지 말아야 한다"며 "말이 패밀리지, 결국 보도방이나 성매매업소를 미화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지적했다.
◈이 아이들은 누가 관리하나…턱없이 부족한 인프라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일탈에 빠져든다. 하지만 제동을 걸어줄 주체는 모호하다.
교정하고 계도하려면 우선 이들에 대한 '접근'이 우선인데, 사실상 촉법 범죄가 발생하는 곳은 학교 담장 너머라 책임질 사람이 없는 것이다.
지난해 3월 '청소년 휴카페' 운영을 시작한 서울 중랑경찰서 이상인 경위는 매일 밤 중랑구 시내를 돈다. 자정쯤 역 주변 번화가에만 가봐도 매일 보이는 얼굴들이 떼지어 다니고 있어서다.
"이들 대부분이 학교를 빠지고 밤에 활동하기 때문에 학교나 스쿨폴리스 차원의 대책으로는 접근조차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얘기다. 교육청 통계나 정책에 잡히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 경위는 "탈학교 가출 아이들을 수용하는 쉼터가 있긴 하지만 이것도 제 발로 찾아오는 아이들에 한해서만 유용하다"고 했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신순갑 정책위원장도 "학교 밖의 아이들에게 접근할 전문기관은 지금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라고 지적한다.
"교육부나 잘 알려진 위센터, 청소년 수련관이나 종합사회복지관 등이 있긴 하지만 현재의 인프라만으로는 아이들을 교정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신 위원장은 "쉼터가 있다 해도 하드웨어적인 역할만 수행할 뿐, 전문성을 갖고 소프트웨어적인 역할을 다 하는 기관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이들은 쉽게 돌아오지 않아…지속적 관심과 관리 필요
"촉법소년 등 저연령대에 범죄를 시작하는 아이들은 이성적으로 설득이 안 된다."
서울남부지방법원 소년부 단독 서형주 판사는 "법정을 의식하지도 않고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잘 모른다"고 촉법소년을 설명한다. "지난주에 법정에 왔던 아이가 또 나타나서 웃으며 인사하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
죄의식이 부족하다보니 자연히 재범률은 높아진다. "소년부 송치 한두 번으로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게 저연령대 아이들"이어서다.
따라서 이들을 계도하려면 교사나 경찰 등의 공무원이 퇴근한 뒤에도 아이들과 접촉할 수 있는 '야간 관리자'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다만 전제가 있다. 아이들은 쉽사리 되돌아오지 않는다. 일시적인 만남으로는 아이들의 마음을 돌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청소년 휴카페' 이상인 경위는 "지난 2년간 매주 월요일마다 휴카페에서 만난 아이들 가운데 2명이 이번에 스마트폰 사용을 끊었다"고 말했다. 기계값과 요금을 훔치거나 뺏은 돈으로 충당하면서까지 스마트폰에 열광하던 아이들이었다.
이 경위는 "천천히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로 여겼다"고 이를 반겼다. 2년여간 학교나 정부 당국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가서 아이들과 접촉한 결과다.
청소년 범죄는 워낙 다양한 원인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경찰이나 학교 독자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지역사회와 시민단체 등이 모두 힘을 모아 문제 해결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다.
10번 범죄를 저지르던 아이가 3번 범죄를 저지른다면 '개선'으로 봐야 하지만, 현재의 청소년 대책은 "여전히 범죄를 저지르니 문제아"로 평가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성과에 대한 성급한 기대가 도리어 교정 가능한 아이들까지 망치고 있다는 얘기다.
2013-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