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가부장제의 사실상 마지막 세대인 노년 남성들은 시대가 바뀌자 역풍의 한 가운데 홀로 서게 됐다.
황덕수(가명·69)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제 가정의 가장이었다. 6.25 전쟁통에서 살아남은 뒤 그야말로 맨 주먹으로 시작했다.
포항제철 1기로 입사해 산업 역군으로 대한민국을,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왔다. 전통적인 엄부(嚴父)로서 가족들을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은퇴를 하고, 자식들이 독립하면서 가장의 권력은 쇠락했다. 자식들은 그래도 명절마다 찾아오지만, 가부장적 권위로 오랜 기간 쌓은 벽 때문인지 살갑게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식들은 부인과 같이 있을 때 더 편안해 보였고, 황 할아버지와 같이 있을 때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황 할아버지는 "분가한 자식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며 "손자들을 보러 찾아가면 아들이나 며느리나 반기지도 않는다"고 울분을 토했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순종적으로 자신을 따랐지만 자식들이 독립하자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동네 사교모임이나 친구들과의 만남 등 집밖 활동에 열심이었고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황 할아버지는 "나이가 드니 집사람과 점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며 "나 어렸을 때 어머니나 할머니의 모습과는 달리 대우만 받으려고 한다"고 한탄했다.
그는 "결국 대화가 안 통하는 건 은퇴하고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하니까 그런 것 아니겠느냐"며 혀를 찼다.
실제로 대한노인회가 만 60세 이상 노인 2541명에게 물어보니 남성 68%는 '가장 위로되는 사람'으로 배우자를 꼽았다. 반면 여성은 34.3%만 배우자를 의지한다고 답했다.
대신 여성의 38.2%는 자녀를 의지한다고 답했지만, 남성은 18%에 불과했다.
노년 남성은 여성에 비해 사교생활에 의지하는 비중도 떨어졌다. '경로당 친구'를 의지한다는 비율은 여성이 12.9%였지만 남성은 5.6%에 불과했다.
이러다 보니 과거 가부장적 가족에서 군림했던 노년 남성은 안팎에서 눈치를 봐야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근수(가명·65) 할아버지는 가정에서 설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지만 이런 울분과 불만을 입밖에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 할아버지는 "매 순간마다 지적하고 싶지만 옛날 가부장제 시절처럼 이야기했다가는 쫓겨난다"면서 "가정의 화목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입을 닫는 수밖에 없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래도 내가 집안의 어른인데 혼담 같은 중요한 문제는 상의를 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자식들은 자기들끼리 정리한 뒤 '돈만 내라'는 식으로 하지만 지적하기도 쉽지 않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황 할아버지나 이 할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고 부인과도 같이 살아 사정이 나은 편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혼자 사는 노년 남성의 생활은 훨씬 더 비참하다.
서울의 한 구청 사회복지사는 "혼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생활은 비교가 불가할 수준"이라고 입을 열었다.
지난 4년 동안 독거노인 방문 업무를 한 이 복지사는 "할아버지들은 살림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의식주 자체가 안 돼 식사 같은 기본적인 생활조차 영위하지 못한다"면서 "방 문을 열면 악취가 날 정도"라고 증언했다.
통계청의 '2011년 사망원인통계' 가운데 60대 이상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보다 3배 이상 높다는 대목은 통계적으로 이를 뒷받침한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펼쳐진 인생 이막. 하지만 쇠락한 가부장들에겐 이렇다 할 낙이 없는 '홀로선 무대'일 뿐이란 얘기다.
2013-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