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60년 지나도록…보훈없는 '국민방위군'

 

 

올해 85세인 김명섭 씨는 일사후퇴 직전 소집된 '국민방위군' 출신이다.

스물두 살이던 1950년 12월, 당시 서울 한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김 씨는 입영통지서도 없이 무작정 소집하라는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입대했다.

김 씨는 정전협정이 있던 1953년 7월 27일까지 방위군 소대장으로 복무했고, 이후에도 계속 군에 남아있다가 1967년 제대했다.

하지만 일부 백과사전이나 역사 기록물은 국민방위군 해체 시기를 1951년 5월 12일로 기록하고 있다. 해체 안이 1950년 4월 30일 의결됐다는 것.

이에 대해 김 씨의 아들 경록(51) 씨는 "모두 잘못된 기록"이라고 주장했다.

아들 김 씨는 “공식적으로 해체됐다는 1951년 당시 교관이던 아버지는 울산 서생과 방어진에서 전방으로 보내는 사병을 훈련하고 있었다”며 "방위군 해체는 60년전 오늘, 정전과 동시에 이뤄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씨는 아버지가 방위군 소속임을 증명하는 훈련 수료증과 당시 사진, 복무 기록이 적힌 일지 등도 꺼내놨다.

노랗게 빛이 바래고 군데군데 찢겨지기도 했지만, 김 씨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충분했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도 “1951년에 군 지휘부의 비리로 국민방위군 해체를 선언하긴 했지만 사건 연루자들이 구속되는 등 흐지부지되면서 군은 계속 남아 있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당시 소집된 방위군은 공식 집계만으로도 최소 50만 명. 일각에선 100만 명에 이른다는 얘기도 나올 정도로 정확한 건 없다.

전쟁통에 경황 없이 급조되다보니 관련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훈 여부를 파악해야 할 국방부조차도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기록에 따르면 1951년 1월 방위군 운영에 문제가 생기면서 4월 30일 폐지법이 통과됐고 5월 12일 해체가 공포됐다”고 일단 '1951년 폐지'에 무게를 뒀다.

하지만 곧바로 "1951년 5월 5일 국민방위군 후신으로 예비5군단이 운영된 것으로 기록돼있다”며, 이후에도 유지됐을 가능성을 열어놨다.

국민방위군 내부 문제가 생겨 폐지하기로 했지만 한 번에 해체하진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와해되는 수순을 밟은 것으로 보인다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 방위군이 완전히 폐지된 날짜 등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고 덧붙였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당시 징병됐다 무참히 숨진 수십만 명의 국민방위군들은 국가 보훈 등의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나라와 후손들을 위해 청춘을 바쳤지만, 60년이 지나도록 나라엔 버려지고 후손들에겐 잊혀지고 있는 셈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이란…상부 착복으로 30만여 명 숨져

 '국민방위군 사건'은 고위장교들의 부정부패로 100일 사이에 아군 수십만 명이 숨진 희대의 사건이다.

6.25 전쟁 당시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정부는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 장정들을 국민방위군에 편입시킨다.

전쟁 발발 6개월 뒤인 1950년 12월 16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통과됐다. 며칠 뒤 서울에 소집된 방위군만도 최소 50만 명에 이른다.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는 국회에서 "100만 내지 80만 장병을 데리고 내려왔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서울에 집결한 수십만 장정들은 교육대가 있는 통영이나 마산, 심지어 제주까지 혹한의 천릿길을 걸어서 돌파해야 했다.

그나마 혹독한 추위를 막을 군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고, 식사는 하루 세 덩이의 주먹밥과 소금국만 제공됐다.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물자를 부정처분해 착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숨진 사망자만도 당시 집계로 30만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의를 제기하면 가혹한 구타가 돌아오거나, 빨갱이로 몰려 맞아 죽기도 했다.

참혹한 행진을 목격한 야당의원들이 1951년 1월 15일 국회에서 방위군 참상을 지적하며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당시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과 국방장관 신성모는 이같은 움직임을 "불순분자와 제5열의 책동"이라고 낙인찍기에 나섰다.

같은해 3월말 결국 ‘국민방위군 의혹사건 국회특별 조사위원회’가 결성됐다. 위원회는 조사 한 달만에 방위군 간부들이 당시 돈으로 77억 원 넘게 부정지출했음을 밝혀냈다.

후임 국방장관 이기붕은 전면 재조사를 명했고 같은해 7월 속개된 군사법정에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 국민적 공분을 샀다.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재무실장 강석한, 조달과장 박창언, 보급과장 박기환 등 다섯 명에겐 사형이 선고됐다.

당시 국회는 이들이 착복한 막대자금이 이승만 세력에 흘러들어간 정황 증거를 포착하고 있었지만, 당사자들이 너무 일찍 처형되는 바람에 사건은 의문만 남긴 채 종결됐다.

 

 

2013-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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