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학부모인 직장인 고아라(39) 씨는 '학생 건강검진' 얘기만 나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첫째와 둘째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겪은 일들로 가슴 속 깊이 불신과 원망이 쌓였기 때문이다.
교육 당국은 현재 전국 초등학생 1학년과 4학년을 대상으로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있다.
고 씨도 지난해 학교에서 지정해준 병원 가운데 가장 큰 곳으로 첫째 아이를 데리고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
'작은 병원보다 낫겠지' 하는 기대감은 비슷한 생각으로 늘어서있는 학부모들의 행렬을 보는 순간 일단 무너졌다.
기다리는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건강검진을 진행하는 병원 측의 태도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20대 초반 대학생처럼 보이는 이들이 의사 가운을 입고 나란히 앉아, 자동차 공장에서 부품을 조립하듯 아이들을 빠른 속도로 검사하고 있는 모습은 아직도 잊기 힘들다.
아이의 건강 상태에 대한 질문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끝난 건강검진. 정작 더 큰 문제는 며칠 뒤 찾아왔다.
첫째가 "칠판이 잘 안보인다"며 불편함을 호소한 것. 불과 며칠전 건강검진에는 시력검사도 포함돼있었고,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온 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간 안과 병원에서는 "아이 시력이 나쁜 걸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느냐"고 물어왔다.
고 씨는 "그 이후로는 학생 건강검진을 절대 못 믿게 됐다"며 "시력이나 청력은 따로 전문병원에 가서 돈주고 검사한다"고 했다.
'학생 건강검진'의 문제는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고도의 장비를 필요로 하는 정밀 검진도 아닌데 굳이 지정된 병원만을 가야 하는지를 놓고도 학부모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서울 강북구에 사는 학부모 김민숙(44) 씨는 "키재고 시력과 몸무게를 측정하고 소변 갖다주고, 진료실에 들어가는 게 끝"이라며 "의사가 '아프냐, 안 아프냐' 물어보고 청진기 한 번 댄 뒤 가라고 하더라"며 혀를 찼다.
김 씨는 "왜 굳이 이런 걸 받으려고 병원까지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며 "일반 환자들하고 분리돼 있는 것도 아니어서 반나절을 버리기 일쑤"라고 했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학부모 이혜민(40) 씨도 "고도의 장비를 이용해 검사 하는 것도 아니고 말로만 물어보는데, 왜 그리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 짜증난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학부모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주먹구구식 운영도 도마에 오른다. 맞벌이 부부가 많은데도 굳이 아이를 평일에만 데려가야 하는 병원도 많기 때문이다.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사는 학부모 김진영(39) 씨는 "지난주 토요일에 아이 건강검진을 받으려고 병원에 전화했더니 '초등학생 건강검진은 토요일엔 안 하니 주중에 5시까지 오라'고 하더라"며 어이없어했다.
김 씨는 "아이 건강검진 데리고 가야 한다고 월차 쓰기 쉬운 조직이 대한민국 어디 있겠느냐"며 "맞벌이하는 집은 아이 건강검진하지 말라는 얘기 아니냐"고 반문했다.
교육 당국도 이런 사정을 고려해 '검진기관 사후 평가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이를 아는 학부모는 극히 드문 형편이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학부모 김혜진(44) 씨는 "평가표가 뭔지 전혀 기억이 없다"며 "그냥 대강 넘어갔던 것 같다"고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각 학교에서 검진 기관과 시기를 정하다 보니 이런 문제들이 생기는 것 같다"며 "일부 의료기관의 불성실 검진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복지부·교육청 등과 협의해 개선해나가겠다"고 설명했다.
2013-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