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당선인과 박근혜 전 대표의 '대타협'으로 봉합됐던 한나라당 공천 갈등이 '당규 논란'을 도화선으로 또다시 '대폭발'을 향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대타협'의 근간이 된 이른바 '살생부 당규 무효화'에 대한 물밑 합의가 사실상 백지화되면서, 양측 불신은 오히려 '봉합' 이전보다 증폭되고 있다.
여기에 물밑 합의의 또다른 주체였던 강재섭 대표까지 강력 반발하고 나섬에 따라, 한나라당 공천 갈등은 이제 어느 한 쪽도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 당선인의 친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 등 '원로 그룹'이 재차 조율에 나서면서, '2차 대타협'으로 재봉합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 '한배 탄' 강재섭-김무성, 공심위 결정에 '격앙' = 30일 오전 열린 한나라당 최고중진연석회의. 그러나 정작 '주재자'인 강재섭 대표는 보이지 않았다.
강 대표의 공식 회의 불참은 지난 2006년 7월 취임 이후 처음이다. 앞서 강재섭 대표는 전날밤 "대표 못해 먹겠다"며 연락을 끊고 사실상 칩거에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정치가 되면 신의가 무너지고, 한나라당은 자멸하게 된다"며 대표직 사퇴까지 시사한 것.
이날 강 대표 없이 진행된 비공개 회의에서 20여분뒤엔 김무성 최고위원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격앙된 표정의 그는 "준비된 정치보복"이라며 울분을 토해낸 뒤, 탈당 가능성을 시사했다.
잠시뒤 국회 본회의장 앞. 기자들과 만난 박근혜 전 대표는 "우리는 그런 규정이 있는 지도 몰랐다"며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되고, 입맛에 맞춰 해서는 안 된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박 전 대표는 "국민도 그런 식으로 한다면 납득할 수 없다"며 "적용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 '李-朴 물밑 합의'와 정면 배치돼 = 세 사람의 이같은 '분노'는 전날 공천심사위가 "당헌당규를 엄격하게 적용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
일면 상식처럼 보이는 합의 내용에 전면 반발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른바 '연둣빛 합의'와는 정면 배치된다는 점에서다.
공심위 구성을 둘러싼 갈등으로 박 전 대표측의 '독자신당 창당' 가능성까지 제기됐던 지난 23일. 이명박 당선인과 박근혜 전 대표는 전격 비공개 회동을 가진 뒤 "공정한 공천에 동감했다"며 봉합 국면을 이끌어냈다.
이에 따라 이튿날인 24일 강재섭 대표와 이방호 사무총장, 김무성 최고위원은 '최대 뇌관'이던 공심위 구성에도 전격 합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내 인사 몫에 최소 한 자리를 요구해온 박 전 대표측이 사실상 '9대 2'로 편중된 지도부 원안을 전격 수용한 것.
김무성 최고위원은 '친박(親朴) 그룹'마저 어리둥절해 하던 합의 배경에 대해 "강재섭 대표와 이방호 사무총장을 만나 그동안 쌓였던 오해를 풀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세 사람은 물밑에서 '친박 그룹의 자체 공천 보장' 등에 대한 합의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른바 '살생부(殺生簿)의 잣대'로 불렸던 당규 적용도 사실상 무효화하기로 합의했다. 바로 논란이 되고 있는 '공직후보자 추천규정' 3조 2항이다.
◆ '親朴 압살 조항'이 논란 핵심 = 지난해 9월 강재섭 대표가 주도해 포함시킨 해당 당규는 "뇌물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 부정부패 관련 법 위반으로 최종심에서 형이 확정된 경우, 공천 신청 자격을 불허한다"고 명시했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표 측은 "김무성 의원이나 서청원 전 대표 등 우리측 핵심을 겨냥한 것"이라며 반발해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나 박성범 김석준 등 '친이'(親李) 의원들도 적용 대상이긴 하나, 김무성 의원이 차지하는 정치적 중량감을 감안할 때 가히 '친박 압살 조항'이라는 것.
김무성 의원은 지난 96년 특가법상 알선수재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서청원 전 대표는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징역형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강재섭 대표는 합의가 이뤄진 24일밤 CBS와의 통화에서 "오래 전 받은 벌금형이나 야당 시절 무리하게 핍박받은 사안 등은 예외로 해야 하지 않겠냐"며 친박의 핵심인 김무성 의원과 서청원 전 대표를 구제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강 대표는 특히 김무성 의원 사례를 거론하며 "그런 것은 예외"라고 잘라말했다. 이방호 사무총장 역시 "공천심사위에서 논의할 일이며, 나는 노 코멘트"라고 일단 말을 아꼈다 .
이에 따라 24일 물밑 합의를 기점으로 극심했던 공천 갈등은 종지부를 찍는 듯했다.
◆ 이재오系 '합의 뒤집기' 나섰나 = 그러나 '2라운드'를 알리는 종소리는 다음날 곧바로 울렸다.
이같은 물밑 합의 사실이 25일 CBS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또다른 당내 주류가 즉각 각을 세우고 나선 것. 이른바 '이재오계(系)'다.
인명진 윤리위원장은 이날 "이번 총선을 포기하려고 마음 먹으면 그렇게 하라"며 사실상 강재섭 대표를 압박하고 나섰다. 인 위원장은 앞서 공심위원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됐지만, 박 전 대표측이 "대표적인 친(親)이재오계"라며 강력 반발해 무위에 그친 바 있다.
안상수 원내대표도 같은날 오전 회의에서 곧바로 공천 심사 기준을 거론하며 "우선 부패 전력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시 이재오 전 최고위원과 가까운 그는 "부패 사건으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공천을 받아선 안된다"며 연일 엄격한 당규 적용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러시아 특사 일정을 마친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27일 '정치 현장'에 복귀하면서,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이 전 최고위원 본인은 여전히 말을 아끼고 있지만, 한 측근은 "당헌 당규는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며 '이재오계'의 기류를 반영했다.
'물밑 합의' 당사자로 알려진 이방호 사무총장도 "당헌 당규 규정대로 할 것"이라며 '김무성 공천 배제' 방침을 시사했다.
◆ 朴측 "의원직 상실한 李당선인은 뭔가" 울분 = 결국 '봉합'이 다시 '대립'으로 치닫게 된 배경에는 역시 '우연'보다 '필연'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박근혜 전 대표측은 "이명박 당선인측이 '약속과 신뢰'를 완전히 뒤집는 행동을 하고 있다"며 배신감을 드러냈다.
박 전 대표의 한 측근은 "김무성 최고위원 문제는 이미 16~17대 총선을 통해 걸러진 것"이라며 "소급 적용은 있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박 전 대표측은 특히 공천심사위가 "선거법 위반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표시했다. '친이'(親李) 인사들이 많이 연루돼있는 선거법 위반 문제를 의도적으로 제외했다는 것.
심지어 "이명박 당선인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은 전력이 있지 않느냐"는 얘기까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 당선인측은 "공천은 전적으로 당의 일"이라며 이번 공천 갈등과는 선을 긋고 있다. '공정한 공천' 합의에 안심하고 있던 박 전 대표측으로서는 '계약'의 상대방이 한순간 증발해버린 셈이 됐다.
이에 따라 박 전 대표측이 또다시 '대타협' 이전의 강경 드라이브로 선회하고 있다. 실제로 친박 그룹 내에서는 또다시 '분당'이나 '탈당'이란 단어가 급격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박 전 대표측 이혜훈 의원은 이날 CBS와의 전화통화에서 "친박계 의원 35명이 김무성 의원과 행동을 같이하기로 했다"며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땐 집단 탈당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이혜훈 의원은 "이러한 사실을 박 전 대표에게도 보고했으며 (박 전 대표가) 상당히 격앙돼 있다"면서 "저쪽의 태도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그러나 "김무성 의원이 오늘은 탈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박근혜 전 대표도 일단 "그때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라며, 공심위 심사가 시작되는 다음달 9일까지 사태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하지만 문제는 박 전 대표측이 '결단'과 '봉합'을 오가며 고민할수록, 양측 이해관계의 접점인 18대 총선까지 남은 달력도 한 장 한 장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남은 달력의 두께만큼 '결단'의 파괴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박 전 대표의 향후 대응이 주목된다.
◆ 협상의 여지도 상존…'2차 회군'될까 = 그렇다면 협상의 여지는 없는 걸까. 해답은 '정치란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란 명제에서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당장 이명박 당선인측과 이방호 사무총장, 이재오 의원 등은 '친박 그룹'의 집단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대응 방안을 숙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이혜훈 의원은 "주류 측에서 내일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했다"며 물밑 협상이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상득 부의장과 전재희 최고위원, 김형오 인수위 부위원장도 이날 최고위원 회의에서 당규의 탄력적 운용과 정치력 발휘를 주문하고 나섰다.
공심위 역시 당초 다음달 9일까지 별도 회의는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상황이 긴박해지자 31일 오후 긴급 회의를 열기로 했다. 당규의 '엄격 적용'을 주장하던 안상수 원내대표도 '벌금형'은 추후 논의하자는 중재안을 이날 냈다.
이에 따라 공심위가 31일 회의에서 당헌당규를 '유연하게' 적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박 전 대표측도 이를 받아들여 '2차 회군(回軍)'하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힘을 얻고 있다.
2008-01-30 오후 4: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