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충격, 그 소리가 아직도 생생해요. 영등포역을 지나갈 때마다 자꾸 생각이 나서 너무 괴롭습니다".
KTX 기장 김휘석(52·가명) 씨는 최근 끔찍한 사고를 겪었다. 영등포역에 진입하다 맞은편 승강장을 향해 선로를 가로지르던 한 대학생을 친 것.
이 대학생은 즉사했고, 김씨는 코레일에 경위서를 냈다. 또 이런 사고 직후 주어지는 닷새의 휴가 기간엔 경찰 조사도 받았다.
"놀랐다 뿐이겠나, 아들 같은 학생이었는데. 마음이 아프고 지나갈 때마다 자꾸 가방 멘 모습이 생각난다".
하지만 김 씨는 제대로 된 상담 치료 한 번 받지 못한 채 다시 KTX 열차에 올랐다. 생계를 위해 철마(鐵馬)를 몰 수밖에 없다.
지금도 김 씨는 사고 당시 충격으로 영등포역에 들어설 때마다 손에 땀이 나고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승강장에 바짝 서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든다.
"운행하다보면 가끔 새가 날아드는 경우도 있는데, 그 이후로는 새가 유리창에 부딪칠라 싶어도 앞을 제대로 못 보겠다".
이렇게 갑작스레 인명사고를 겪고 고통받는 KTX 기관사는 비단 김씨만이 아니다.
KTX에 치여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매년 60여 건 발생하는 걸 감안하면, 대부분의 기관사들이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김 씨는 "기장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하나 같이 모두 사고 경험자일 것"이라며 "자살 사고 이후 매일 고민하다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김 씨는 또 "그나마 지금은 상황이 나아졌다"며 "옛날엔 휴가도 없었고, 기장들이 직접 사체를 옮기고 수습해야 했다"고 털어놨다.
사실 투신 시도를 비롯한 인명사고가 목전에 다가와도, 기관사들이 대처할 방법은 '비상정지' 버튼을 누르는 것 외에는 달리 없다.
김 씨는 "시속 90㎞ 이하로 달리게 돼있는 비정차 구간에서도 비상 버튼을 누른 뒤 멈추기까진 300m가량 걸린다"며 "시속 300㎞일 경우엔 3.5㎞쯤 지나 멈추게 돼있다"고 했다.
부족한 인력은 상황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사고가 나더라도 교대 인력이 대기중인 주요 거점역까지는 운행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KTX는 1인 승무로 운용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체할 예비 기관사가 없는 경우 교대하지 못한 채 계속 열차를 운행해야 한다. 이러다보니 상행길에서 사고가 났느냐, 하행길에서 났느냐에 따라서도 희비가 크게 엇갈린다.
철도노조 최정식 운전조사국장은 "상행길에 사고가 나면 곧바로 운행을 종료할 수 있지만, 하행길에 나면 도착지에서 교대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
대체 기관사를 요구했는데 여력이 없을 경우, 방금 겪은 사고의 끔찍한 광경이 생생한 가운데 다시 상행길에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이러다보니 기관사들의 정신적 고통은 갈수록 커지고 있고, 직장을 그만두는 이들도 적지 않다.
코레일은 이런 문제를 보완하는 측면에서 지난해 철도노조와의 단체협약을 통해 사고를 겪은 KTX 기장이 심리 상담을 신청할 경우 치료비 전액을 보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철도노조 한 관계자는 "심리 상담을 비롯한 정신적 치료를 받겠다고 신청한 기관사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정신적 치료 자체가 곧 생계를 잃는 결과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현행 철도안전법 11조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을 철도운전면허 결격사유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기관사들 사이에선 '최고 엘리트'로 꼽히며 치열한 경쟁을 뚫은 KTX 기장들이 '실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신 치료를 신청하기란 쉽지 않은 형편이다.
권동희 노무사는 "일반 기관사들보다 KTX 기장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훨씬 크다"며 "하지만 KTX 운전을 포기하면서까지 치료를 신청하겠다는 사람이 과연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정신과 전문의들은 '초기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정신 질환은 초기에 발견하면 완치가 가능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완치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고 직후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치료를 미루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임상혁 소장은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 장면을 본 기관사의 스트레스는 전쟁에 참여한 군인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보고까지 나왔다"고 지적했다.
임 소장은 이어 "사고를 경험한 KTX 기장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경위서 작성이 아니라, 상담 치료를 받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3-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