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후 서울 영등포역. 9개의 플랫폼 가운데 유독 KTX 승강장인 7~9번 플랫폼에서만 시민들의 '안전벨트'인 스크린도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자칫 발만 헛디뎌도 선로에 떨어져 최대 시속 300㎞의 KTX열차와 맞닥뜨릴 수 있는 아찔한 장소. 하지만 제대로 된 보호장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는 건 그저 바닥에 노랗게 그은 안전표시선뿐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승강장과 승강장 사이에 있는 KTX 선로를 가로질러 뛰어다니기도 했다. 지난 1일 졸다가 정차역을 놓친 대학생 우모(20) 씨가 급하게 반대편으로 건너가다 숨진 것도 같은 배경에서다.
현재 전국엔 설치된 KTX 승강장은 정차 기준 41곳. 정차하지 않고 지나치는 역까지 따지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이 가운데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승강장은 단 한 곳도 없는 실정이다.
투신 자살이 끊이질 않았던 지하철의 경우 지난 2009년 이후 관련 사고가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다.
당시 서울메트로가 운영하는 지하철 1~4호선 중 120개 역, 서울도시철도공사의 5~8호선 가운데 157개 역, 민자사업체인 서울시메트로 9호선 25개 역에 스크린도어가 설치됐기 때문.
설치 전만 해도 서울메트로에서만 매년 20명가량이 사고로 숨졌지만, 설치 직후인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사망 사고는 단 한 건에 그쳤다. 부상 사고도 전무했다.
서울메트로 한 관계자는 "스크린도어 설치 이후 지하철 투신 사고가 제로에 가까워졌다"며 "자살 예방에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지하철이 '자살 청정구역'이 되자, 무방비 상태인 KTX로 몰려가는 이른바 '풍선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
실제로 철도교통에서의 승객 사상 사고 가운데 코레일 관리 구간에서 발생한 건 지난 2011년 56건, 지난해엔 60건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올들어 4월까지만도 19건이나 된다.
코레일 한 관계자는 "2009년 이후부터 KTX에 자살 사고가 몰리고 있는 건 사실"이라며 "스크린도어 없이 무방비로 노출된 KTX 선로를 찾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러니 시민들의 불안감은 날로 커질 수밖에 없다. 경기도 의왕에 사는 김수정(43) 씨는 "스크린도어가 없으니 불안하다"며 "기차 선로에도 설치되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 방배동에 사는 노모(76) 씨도 "작은 역에도 설치돼있는 스크린도어를 왜 큰 역에 설치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철도당국은 '예산 문제' 때문에 설치가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코레일 관계자는 "가장 큰 문제는 일단 예산 문제"라며 "관계부처와 협의중이긴 하지만 워낙 막대한 예산이 든다"고 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도 "다른 나라를 봐도 기차역에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예는 없는 걸로 알고 있다"며 "떨어져도 바로 올라올 수 있는 '저상홈'인데 굳이 돈 들일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은 '변명'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코레일이 '역사 꾸미기'에 매년 쏟아붓는 돈이면 스크린도어를 설치하고도 남는다는 것.
스크린도어 설치 업체들에 따르면, 저가형으로 개발된 최신 '로프형 스크린도어'의 경우 역 한 곳당 설치 비용이 10억 원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KTX 정차역에만 모두 설치한다 해도 총 예산이 5백억 원 미만이란 얘기다.
코레일은 지난해 9천억 원대 매출을 달성했고, 올해도 6개 계열사를 통해 1조 원 매출을 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지난 2004년 계열사 설립 이후 역대 최대 규모로, 올해 영업이익 목표는 300억 원 수준이다.
일각에서는 또 KTX의 속도 때문에 스크린도어를 설치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스크린도어 업체 한 관계자는 "시속 300㎞라 해도 스크린도어 설치에는 어떤 기술적 문제가 없다"며 "이미 '로프형'이나 '난간형' 등 다양한 형식의 스크린도어가 개발돼있어 어떤 KTX승강장이든 설치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인명'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면, KTX 승강장 스크린도어 설치는 비용이나 기술 모두에서 큰 문제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셈이다.
2013-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