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를 아빠라 부르기도'…눈치보며 크는 아이
"아빠 직업은 회사원, 나이는 42살".
가정 조사란에 쓰는 아빠는 있다. 하지만 같이 사는 아빠는 없다. '엄마'라는 말을 하게 됐을 때부터 아빠는 없었다. 다들 엄마하고만 사는 줄 알았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오더니 "아빠라고 불러보라"고 했다. 과자와 장난감도 잔뜩 사줬다. 밤이 되자 다시 엄마한테 데려다주더니 그는 돌아갔다.
다음날 엄마에게 "아빠가 보고 싶다"고 했다. 순간 엄마 표정이 굳어졌다. 얼굴도 빨개졌다. 화를 내는 것도, 우는 것도 같았다.
화장실로 뛰어간 엄마는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흐느끼는 소리가 한참 들렸다. 토끼눈이 되어 나온 엄마. 그 이후로는 절대 '아빠'란 단어를 먼저 꺼내지 않았다.
지난해 아빠가 스마트폰을 사줬다. "집으로 전화하면 엄마가 싫어한다"는 이유였다. 그 이후 서너 번 전화가 왔다. 술에 취한 아빠는 잔뜩 혀 꼬부라진 소리로 엄마 욕을 늘어놨다.
옆에 있던 엄마가 전화기를 빼앗은 뒤 끊어버렸다. 그 뒤로 지금까지 아빠의 연락은 없다. 이제는 익숙해진 걸까. 아빠가 막 보고싶거나 하진 않다. 다만 가끔은 다른 친구들처럼 같이 목욕탕에 갈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을 뿐이다.
◈ 성인 자라도…자녀 가슴의 '멍'은 매한가지
"엄마랑 아빠 둘 중에 누가 더 좋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받았던 질문. 장난인 걸 알면서도 늘 난처했다. 부모님 중에 하나를 택하라니. 그건 너무 가혹했다.
장난으로만 여겼던 질문은 27살이 되던 올해 현실이 됐다. 답을 해야만,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지역 대학교에 진학한 뒤로 공부니, 취업이니 핑계를 대며 집에 가지 않았다. 그 시간 엄마와 아빠는 서로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평소 사이가 좋기만 했던 게 아니란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최근에는 오래 살아온 집도 아예 처분했다. 아빠는 서울 강북에, 엄마는 여동생과 함께 경기도 분당에 따로 떨어져 살게 됐다.
아빠는 "너도 이제 성인이니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다. 혼자 된 가여움을 생각하면 아빠 곁에 가야 할 것 같다. 그러자니 남자 없이 살게 될 엄마와 여동생이 눈에 밟힌다.
이래저래 마음이 편치 않다. 한창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데. 직장은 서울에 갖고 싶은데. 가족들 걱정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 자녀 양육 '길' 안 보여…제도적 지원은 '남 얘기'
부모가 헤어지면 자녀의 가슴은 무너진다. 아빠를 따라가면 엄마와 멀어지고, 엄마와 살자니 아빠와는 생이별이다.
갈등의 당사자인 부부도 힘들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자녀들의 걱정과 두려움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 아이들도 부모 얘기가 나오면 공격적이 되거나, 까닭없이 주눅 드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래서다.
부부가 별거에 들어가면 자녀들은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같이 살지 않더라도 정기적으로 자녀를 만날 권리야 있긴 하다.
하지만 2~3주에 한 번씩 겨우 얼굴이나 보는 아빠나 엄마가 되고 만다. 아이들은 점차 서먹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별거 이후 자녀들을 '나 몰라라' 하는 경우도 있다. 별거 상태에서도 양육비를 대줘야 하지만 연락을 끊어버리거나, 막무가내로 양육비를 주지 않고 버티기도 한다.
별거중인 부부의 경우 이혼 부부에 비해, '한부모가족'으로 선정돼 각종 지원 혜택을 받기도 까다로운 실정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 부장은 "별거 부부 가운데 아이를 맡는 쪽은 경제 문제나 양육 문제로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며 "서로의 적대감을 증가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결국 '동거' 아니면 '이혼'이라는 이분법으로 발전, 부부 관계를 극단으로 치닫게 만든다는 것. 조 부장은 "별거 당사자와 그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적·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50대 이후로 각방을 쓰는 이른바 '거실 부부', '투명 부부'도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통계상엔 '동거 부부'로 잡혀있지만, 함께 사는 자녀들에게는 '한지붕 별거 부부'로 느껴질 정도로 관계가 소원한 경우도 많다.
성문가정법률사무소 송인백 변호사는 "부모들의 교육이 중요하다"며 "특히 미성년 자녀가 있는데 별거하려는 부부들은 양육 상담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별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자녀들과의 대화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배우자를 비난하거나 본인 의사를 주입시키려 해선 안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한쪽 편을 들어야 한다'는 강압감에 자녀들이 시달릴 우려가 있어서다.
송 변호사는 특히 "배우자에 대한 비난은 아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줄 수 있다"며 "자녀의 감정을 존중해주려는 노력이 매우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또 이미 별거에 들어갔더라도 충분한 대화와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만 이어간다면, 얼마든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당부했다.
2013-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