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한화갑 대표가 11일 한나라당 한 모임이 초청한 간담회에 연사로 선 것은 상당히 '이례적 사건'이다. 본류를 거슬러 따지자면 군사정권 시절에는 첨예한 대척점에 서있던 양측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색한 만남일 수도 있던 이날 자리를 시종 화기애애하게 만든 것은 중진 정치인들의 연륜에서 배어나온 유머였다.
한화갑 대표는 마이크를 잡자마자 "한나라당이 저를 만나자고 하신다길래 혹시 한나라당에 무슨 변동이 있나해서 상당히 기대를 하고 왔다"고 운을 뗐다. 물론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관심이 온통 개봉박두한 정계개편에 쏠려있는 점을 빗댄 농담이다.
그러면서 한 대표는 "박희태 부의장이 오신다길래 왔다"고도 했다. 두 사람은 DJ정권 시절 여야 원내총무로서 때론 부딪치고 때론 타협했던 사이다. 자연스레 두 당의 지난 과거를 떠올리게 하면서 이날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마디인 셈이다.
이에 박희태 의원은 "폭탄주 고문으로 이자리에 온 것 같다"고 화답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정치9단' '총체적 난국' 같은 유행어를 탄생시킨 헌정사상 최장수 대변인이자, 폭탄주의 효시로 알려진 그다.
'폭탄주의 효시' 박 의원의 이어진 얘기는 순간 한 대표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들 수도 있는 '폭탄급' 발언이었다.
박 의원은 "지난 97년 대선 때 YS와 DJ가 쟁패를 벌였는데, 그때 DJ가 대통령이 되면 측근들이 다 말아먹을 것이란 여론이 비등했다"며 "이때 '가신'이라 불린 예닐곱 명이 DJ가 대통령이 돼도 임명직엔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운을 뗐다.
한화갑 대표 앞에서 '가신(家臣)'이란 단어를 꺼내다니. 대단한 결례가 아닐 수 없어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하지만 박 의원은 그 평소의 졸린 듯한 눈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저는 그때 '대통령 되려고 별 소리를 다하는구나' 했다. 속으로 '안 하긴 뭘 안해' 했다"고 말을 이어갔다.
아슬아슬하던 분위기의 반전은 이 지점에서 터져나왔다. 박 의원은 "그랬는데 정말 5년동안 보니 다른 사람들은 약속 안 지킨 사람도 있지만, 우리 한 대표는 전혀 그런 자리에 임명된 일이 없다"고 추켜세웠다. "그때부터 존경하게 됐다"는 찬사도 덧붙였다.
박 의원은 또 두 사람이 원내총무를 맡던 시절을 회상하며 "당시 우리가 야당이니까 한 대표가 잘 봐줘야 국회가 잘 돌아갈 수 있었다"며 "내가 이름 풀이를 해주겠다면서 '화에는 갑'이라고 했다"고 얘기했다.
'화(和)'에는 '갑(甲)'이라. 일반적인 계약 관계에서 '갑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실 것이다. 결국 주도권을 쥔 여당이 화해와 협력에 있어서도 '갑'의 위치에 있는 만큼, 한마디로 "잘 좀 봐달라"는 이름풀이가 되겠다.
하지만 박 의원은 "그 이후 양보를 잘해줄 걸로 알았는데 '화에는 갑'이 아니더라구"란 말로 좌중에 웃음을 선사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둘다 야당이니 야야끼리 '화에는 갑'이 돼야 한다"고도 했다.
이날 20여분에 걸친 한화갑 대표의 연설이 끝난 뒤 박희태 의원은 "어유, 잘했습니다"라고 분위기를 띄웠다.
이에 한화갑 대표는 "박 의장님께 그 말 들으려고 제가 이 자리에 왔다"면서 "원내총무할 때 얻은 가장 큰 재산이 있다면 이 양반이랑 가까와진 것"이라고 화답했다.
곁에 있던 강재섭 대표도 "자동폭탄주랑 가까와지셨네"라고 한마디 농을 던졌다.
한편 한화갑 대표는 이날 대통령 중임제 등 개헌론을 주장하면서 역대 대통령의 장점을 하나씩 거론했다.
5천년 역사에 존경할 만한 인물이 세종대왕이나 김구 선생으로 압축되는 현실은 암담하다면서, 역대 대통령들의 장점 만들어주기 운동을 펼치자는 색다른 제안을 내놓은 것.
가령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이고, 박정희는 굶주림을 없애준 대통령이며, 전두환은 물가를 잡았고, 노태우는 지방자치를 실현했고, 김영삼은 군 파벌을 없애고 금융실명제를 도입했다"는 점을 부각시키자는 것이다.
지난 시절 최대의 피해자 중 한 명인 한화갑 대표의 입에서 나온 이러한 얘기가 나는 상당한 유머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분들은 별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2006-09-12 오후 3:35:17 | ONnOFF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