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이 병원에 휘둘리고 있다. 지난 2000년 의약분업 이후 의사 처방전에 따라 약사의 수익이 매겨지면서다. 병원 없이 생존할 수 없는 상황이 되다 보니, 약국들은 손해와 편법을 감수하면서 병원 유치 총력전에 나섰다. '병 주고 약 준다'는 이미 옛말인 시대. CBS는 '리베이트 줘야 처방전 주는' 의약분업의 실태와 대안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주]
서울 강북에서 20년 동안 약국을 운영해 온 A(52) 씨는 지난해 중순 결국 문을 닫았다. 3년 전 약국 인근에 있던 병원이 갑자기 이사를 가버린 탓이다.
의약분업 당시 근처에 병원이 두 곳이나 있었기에, A 씨는 누구보다 '분업'을 반겼다. 하지만 병원이 이사를 가면서 상황은 180도 돌변했다.
약국 개업 10년 뒤 인근 병원 한 곳이 이전했고, 남은 병원마저 자리를 옮기면서 약국 매출은 바닥으로 치달았다. A 씨는 "처방전 조제 약 말고 일반 약만 팔아서는 버티기 힘들었다"고 했다. 결국 매월 수익이 임대료보다 낮아지면서, A씨는 빈손으로 '분업된' 업계를 떠나야 했다.
◈ 처방전에 먹고 사는 약국…병원 이사가면 ‘휘청’
지난 2000년 의약분업 시행 이후 약국의 수익이 의사 처방전에 따라 결정되면서, 병원은 약국의 '슈퍼 갑(甲)'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의약분업 이전에는 약국의 수익을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가 인근 세대수나 교통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병원과의 '거리'에 정비례한다.
같은 건물에 있다면 더더욱 좋다. 특히 그 병원이 처방전을 많이 내는 곳이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약국을 쥐고 흔들 수 있게 된 병원은 어느덧 무리한 요구도 거침없이 하게 됐다. 동시에 약사는 의사의 눈치를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게 됐다.
4개월전 약국 문을 닫은 B 씨도 A 씨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자와 만난 B 씨는 "의사가 병원 이전을 빌미로 임대료를 대신 내달라고 했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서울 광진구의 한 내과 건물 1층에서 약국을 운영했던 그에게 던져진 제안은 이랬다. "병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는데 매월 임대료만 내주면 이사가지 않겠다"는 것. 해당 내과의 매월 임대료는 300만 원에 이르렀다.
처방전 없이는 생존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던 B 씨는 "1년 정도는 '울며 겨자먹기'로 감당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처방전에 의존하는 약국 수입으로는 달마다 감당하기엔 버거운 돈이었다. 결국 버티다 못한 B 씨는 '임대료 대납'을 거부하고 나섰다.
병원은 곧 이전했다. B 씨도 약국 문을 닫아야 했음은 물론이다.
◈임대료 대납에 인테리어까지…심지어 간호사 월급도 요구
B 씨가 겪은 상황은 어찌 보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건물에 새로 들어오면 인테리어를 요구하거나, '이전'을 무기로 리모델링 비용, 심지어 간호사 월급까지 내달라는 병원도 있다.
서울 관악구에서 만난 약사 C 씨는 "병원이 개업하거나 약국이 병원 건물로 들어갈 때는 기본적으로 의사가 약사에게 3000만~5000만 원쯤 요구한다"고 했다. 다름 아닌 '처방전 대가'다.
C 씨는 "이 정도는 싼 편"이라며 "처방전 한 건에 500원씩 받거나, 한 달에 100건 해줄테니 1억 원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혀를 내둘렀다.
"만약 이 때 '돈을 못 주겠다'고 하면 약국 문조차 열 수 없다"는 얘기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악어와 악어새'를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행태는 사실 의약분업 시행 직후부터 꾸준히 지적돼왔다.
환자가 지역 약국에서 편리하고 안전하게 약력 관리를 할 수 있도록 한 당초 취지와는 달리, 약국이 병원에 예속되는 기형적 시스템을 초반에 개선하지 못하면서 관행처럼 굳어진 탓이다.
약국은 지금 포화상태다. 기존 약국들이 워낙 많다보니 임대료를, 간호사 월급을 대납하지 않으면 약국 개업은 꿈꾸기도 힘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의사가 요구하기 전에 약사가 '알아서 기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약사가 건물 한 채를 통째로 구입한 뒤, 1층엔 자신의 약국을 열어놓고 윗층에 임대료 없이 병원을 유치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A 씨는 "젊은 의사들이 병원을 개업할 때는 약국이 인테리어까지 도맡아 해준다"며 "갈수록 약사의 역량이 줄어들고 존재 가치도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며 울분을 토했다.
B 씨 역시 "병원은 강해지고 약국은 약해지고 있지만 이런 현실을 얘기하기 힘든 게 사실"이라며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해당 병원이 알면 약국이 피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을 흐렸다.
2013-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