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가맹점'과 '소비자' 가운데 한쪽을 선택해야 할 시점이 임박했다.
다음달 22일부터 시행될 신용카드 수수료 체계 개편을 앞두고 카드사와 가맹점들간의 개별 협상이 한창 진행중이기 때문.
개편안의 요점은 카드사들이 기존의 '업종별' 대신 '가맹점별'로 수수료율을 협상하게 함으로써, 영세 가맹점 수수료는 낮추되 대형 가맹점 수수료는 소폭 올리겠다는 것이다.
시행 한 달 전까지는 변경된 수수료율을 각 가맹점에 통보해야 하는 만큼, 그 선택의 시기는 채 열흘도 남지 않았다.
대형 가맹점들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그 이후의 조정 절차는 사실상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대형 할인마트나 백화점처럼 연간 매출 1천억원이 넘는 가맹점들은 카드업계에선 '슈퍼갑'으로 통한다. 이들 대형 가맹점이 계약을 해지할 경우 치명적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평균 2%대를 훌쩍 넘는 일반 가맹점보다 훨씬 낮은 1.5%대의 수수료율을 대형 가맹점들이 적용받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정글식 자본주의 논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 2003년 수수료 낮춘 호주…대형 가맹점의 '부익부'
실제로 금융당국이 개편안을 내놨을 때 카드사나 대형 가맹점들이 보인 공통된 반응도 "시장주의 논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 당국이 가맹점 수수료 문제에 개입하고 나선 곳은 비단 우리나라뿐은 아니다.
호주의 경우 지난 2003년에 이미 0.95%였던 신용카드 정산 수수료를 0.55%로, 2006년에 다시 0.5%로 인하했다.
정작 문제가 된 건 이러한 수수료 인하가 소비자나 영세 가맹점 혜택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대형 가맹점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
당시 호주 당국은 수수료율 인하에 따른 카드사 손실을 감안, 그 전까지 금지해왔던 '써차지'(surcharge·별도 수수료) 부과를 허용했다.
현금 지불시보다 카드 결제시 소비자들로부터 일정 수수료를 더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대형 가맹점과 카드사들의 배만 불린 형국이 됐다.
시드니 시내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교포 켄 고(49) 씨는 "수수료 인하 조치가 우리 같은 중소 가맹점에는 별 영향이 없었다"며 "대형 가맹점들이 써차지를 부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령 대형 가맹점인 코카콜라에서 물건을 들여올 때 2%의 써차지를 내고 있지만, 영세 가맹점 입장에선 고객들에게 다시 써차지를 부과하긴 힘들다는 것.
시드니 시내에서 면세점을 운영하고 있는 제임스 문(55) 씨도 "당시엔 수수료 인하가 파격적이었다"면서도 "써차지가 함께 도입되면서 고객 부담은 오히려 늘어났다"고 지적했다.
◈ 택시요금에도 10% 써차지…소비자 반발 커져
실제로 호주 당국의 통계에 따르면, 써차지가 허용된 이후 연 매출 5억 호주달러(약 5천670억원)가 넘는 대형 가맹점 가운데 이를 부과하는 곳은 50% 가까이로 늘어났다.
콴타스항공의 경우 신용카드 결제시 승객 1인당 7.7호주달러(약 8천732원)의 써차지를 무조건 물리고 있고, 택시비 카드 결제 서비스 업체인 캡차지도 요금의 10%를 써차지로 받고 있다.
택시기사 레오 알렉스(31) 씨는 "10% 써차지는 우리가 받는 게 아니라 카드 결제 시스템에 대한 요금"이라며 "그래도 손님 가운데 70%는 카드로 결제한다"고 했다.
반면 영세 가맹점 가운데 써차지를 받는 곳은 30% 안팎에 불과한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 소비자들의 불만도 커질 수밖에 없다.
시드니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카일리 딘(28) 씨는 "택시 등을 탈 때 써차지 부담이 상당히 크다"며 "여기저기 '현금 결제만 받는다'(Cash Only)고 써붙인 가게도 워낙 많아 불편하다"고 토로했다.
호주 최대 소비자 단체인 '초이스'도 지난해부터 이미 "써차지에 상한선을 두는 등 규제 방안을 마련해달라"며 줄기차게 정부 당국을 압박하고 있다.
◈ 국내서도 이미 '써차지 도입' 논의 불지펴
한국과는 달리 신용카드 발급이 매우 엄격한 호주의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수수료 체계 개편과 이에 따른 후유증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대목이 크다.
수수료 인하 이후 연회비는 치솟고, 각종 부가서비스와 포인트 적립이 사라지고 있는 호주 상황은 이미 한국에서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미 국내서도 수수료율 인하와 관련, 써차지 도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벌써부터 제기되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여신전문금융업법 제19조는 신용카드와 다른 지급수단간의 가격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행 금융결제국 관계자는 지난 6월 한 보고서를 통해 "가맹점들이 신용카드 사용자와 현금 사용자 등에 대해 가격을 차별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써차지 도입 논의에 불을 지폈다.
호주나 네덜란드처럼 신용카드 사용자에게 써차지를 부과하거나, 현금이나 직불형카드 결제시 판매가격을 할인해주도록 허용하자는 얘기다.
◈ 국내 여건상 '시기상조'…카드업계마저 '난색'
그러나 가맹점 수수료율 인하도 이제야 첫 발을 떼는 상황에서 써차지 도입 논의는 '시기상조'란 지적이 대부분이다. 자칫 가맹점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만 가속화시킬 수도 있어서다.
국내 소비자들의 정서도 여느 나라와는 다르다. 카드업계 한 관계자는 "수수료율 인하에 따른 카드사 순익 감소는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써차지 도입 논의는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가뜩이나 리볼빙 결제나 카드론 등 이른바 '약탈적 대출' 논란도 끊이질 않고 있는데, 섣불리 써차지 문제를 꺼내들었다간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자본주의의 '총아'인 미국도 지난 7월 써차지를 도입하긴 했지만, 우리와는 또 상황이 전혀 다르다.
정부 개입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높은 카드 수수료 부담을 참지 못한 가맹점들이 비자와 마스터 등 카드사를 상대로 '수수료 담합 소송'을 낸 것.
이에 카드사들이 가맹점들과의 법정밖 합의 끝에 '서차지 금지' 규정을 폐지하기로 하면서, 결국 모든 부담은 소비자에게 전가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뉴욕과 텍사스 등 10개 주에서 여전히 써차지 금지 규정을 법에 두고 있는 데다, 소비자들의 반발도 거셀 것으로 보여 적극적 도입이 쉽지만도 않은 상황이다.
◈ 절실한 건 대형 가맹점 횡포 규제…미래 보는 선제책 내놔야
결국 호주와 미국 상황을 고려해봐도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써차지 도입'이 아닌, 효과적인 '대형 가맹점 규제' 대책으로 보인다.
호주에 없는 '리베이트 논란'까지 끊이질 않는 국내 대형 가맹점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금융 당국이 당장 다음달 초까지 카드사와 대형가맹점간 수수료 협상에 초점을 맞춰 '테마 검사'를 벌이기로 한 건, 그래서 환영할 만한 대목이다.
대형가맹점이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부당행위를 할 경우 징역 1개월이나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겠다는 건데, 매출 규모 등을 감안해 보다 실효성있는 억제책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제는 현실 봉합을 위한 후속책이 아닌, 미래를 위한 선제책을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못하면 호주나 미국의 경우처럼, 대형 가맹점과 카드사의 '일시적' 부담이 소비자 전체의 '장기적' 부담으로 되돌아올 우려가 높다.
'대형 가맹점'과 '소비자' 가운데 한 쪽을 선택해야 할 시점이라고 거듭 강조하게 되는 이유다.
"골목상권을 살리겠다"며 단순히 '수수료 인하'만을 부르짖는 미래 권력자들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대형 가맹점 수수료와 써차지 도입 문제에 대한 근본 대책을 내놓지 못한다면, 당신은 장기적으로 주민들에게 부담만 떠안기는 '나쁜 골목대장'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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