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앞에 사익(四益)이 있다.
그 하나는 사익(邪益)이다. 사사로운 영달 앞에 불의도 불사하며 기자를 파는 부류가 있다. 흔히 말하는 '구악'으로, 이미 기자임을 포기한 기자(欺者)들인 셈이다.
그 둘은 사익(私益)이다. 불법을 자행하진 않으나 오직 자신의 영달만에 따라 펜을 움직이고 운신한다. 이기만 추구하는 기자(己者)라 할 수 있다. 역시 의롭진 않다.
그 셋은 사익(社益)이다. 그래도 이기 단계를 넘어 몸담고 있는 조직과 사회를 위해 움직인다. 자신의 삶터, 자신의 일터를 중시하는 기자(基者)로 부를 수 있으나, 결국은 사익(私益)과 맞물려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넷은 사익(史益)이다. 기자(記者)의 본연이라 할 수 있다. 선사(先史)를 올곧게 평가하고 현사(現史)를 냉정하게 기록해 후사(後史)에 본으로 남기기 위해 복무하는 자들이다.
보통 사익(邪益)은 사익(私益)으로, 사익(私益)은 대개 사익(社益)으로, 사익(社益)은 또 사익(史益)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스스로도 부끄럽기 때문이다.
결론은 하나다. 사익(史益)만을 생각하고 그 명분과 상식에 기대어 움직이면 된다. 기자(記者)의 이성과 감성, 그리하여 그 붓을 움직이는 단 하나의 동력이어야 한다.
사실, 그 본질은 역순이다. 본연대로 사익(史益)을 추구하면 사익(社益)은 따라온다. 그래서 창출된 사익(社益)은 사익(私益)으로도 반영된다. 이렇게 조성되는 사익(私益)에는 사익(邪益)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기자(記者)는 그래서 사관(史官)이며, 사관(史觀)을 가져야 한다. 사관(史觀)이 없는 자, 사관(史觀)을 숨기는 자는 기자(記者)가 아니다. 이런 자들이 보통 객관을 말하며, 중립을 얘기한다. 스스로의 사관(史觀)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독자(讀者)들에게 사실(事實)만 제공하는 것으로 기자(記者)의 역할이 끝나는 게 아니다. 그 사실(事實)을 판단해 사관(史觀)을 내놓는 게 사관(史官)으로서의 기자(記者)다. 독자는 궁극적으로 그 사관(史觀)을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事實) 뒤에 숨는 것은 무능이며 직무 유기다. 기자(記者)의 길이 아닌, 기자(欺者)의 길이다.
수많은 파업과 해고를 불러온 그간의 언론 상황을 보라. 그 본질도 결국 ‘사익간의 충돌’이다. 앞으로도 기자(欺者)는 기자(記者)를 탄압할 것이며, 기자(己者)는 침묵할 터. 그리고 탄압의 도구는 ‘중립’이란 단어로 포장될 것이다.
과연 언론은 사회에, 역사에 제대로 복무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우리 스스로 거듭 자문해볼 때다.
기계적으로 가운데 어정쩡하게 설 것인가. 사관(史官)의 본연대로 바른 위치에 설 것인가. ‘중립’(中立)이 아닌 ‘정립’(正立)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