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가 사과해야 한다

유비가 천하통일의 대몽(大夢)을 갖게 된 것은 제갈량을 참모로 얻게 되면서부터다. 그리고 그 계기는 참 아이러니컬하다.


유표에게 몸을 맡기고 있던 유비는 유표의 부하인 채모의 계략을 피하려다 길을 잃었는데, 우연하게도 당대의 뛰어난 지략가 중 한 사람인 사마휘를 만나게 된다.

이때 사마휘는 유비에게 "복룡(伏龍)과 봉추(鳳雛)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잃어버린 길 위에서 길을 찾은 셈이다.

당시 47살이었던 유비는 27살 '복룡' 제갈량의 초가집에 세 번을 찾아간 끝에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다.

천하의 모사를 얻은 유비는 그와의 관계를 수어지교(水魚之交), '물 만난 물고기'라 했다.

'룡'이었던 제갈량이 '물고기'가 되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건 역시 스무 살 연상의 유비가 몸을 최대한 낮추고 자신을 예(禮)로써 대했던 때문이며, 그 작은 에피소드에서 유비 안의 큰 그릇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일 터이다.

내년 대선을 앞둔 한나라당의 작금 상황은 위·촉·오가 겨루던 삼국지(三國志)를 연상케 한다.

박근혜, 이명박, 손학규로 삼분(三分)되는 당내 판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던 2세기무렵 중국 대륙의 팽팽한 힘겨루기를 빼닮았다.

지금 타블로이드 신문 스타일로 누가 조조를 닮았네, 이런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삼고초려' 얘기를 꺼내고 싶을 뿐이다.

물론 삼국지와는 달리 이들 세 사람은 현재로선 '한 나라의 장수들'이다. 또 이재오는 초가가 아닌 절에 들어앉았고, 그는 박근혜에겐 제갈량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이재오는 '선동가(先動家)'이다. 기본적으로 앞에서 움직이는 게 어울리는 '투사형'이자 '전위부대형'이지, 참모일 수 없다는 점에서 제갈량과는 거리가 멀다.

전당대회에서 2위를 하긴 했지만 그의 연설은 언제나처럼 압도적이었다.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당대 최고의 연설이 그의 입과 팔뚝질에서 뿜어져 나왔다.

전당대회 전날 밤 휴대폰으로 날아든 문자메시지는 나에게 '이재오의 눈물에 속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악어의 눈물'이란 상대방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토론에서 흘린 눈물에 나는 공감한다.

없는 살림에 딸 시집 보내려고 여기저기 돈 꾸러다니던 시절을 회상하며 흘러나온 눈물을 정치적이라고 매도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그 고달팠던 삶에 대한 애상에 전혀 공감대를 갖지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웰빙 이미지'만 굳히게 될 뿐이다.

어려움이 뭔지 모른다는 것은 대다수 서민들과 어떠한 끈으로도 연결돼 있지 않다는 것을 자인하는 일이며, 한나라당이 항상 절반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재오는 한나라당의 소중한 자산임에 분명하다.

그만큼 서민적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실제로 서민의 삶 속에서 숨쉬고 있는 인물이 한나라당 그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젊은 시절 그만큼 치열하게 '함께 하는 세상'을 고민했던 사람이 한나라당 안에 또 누가 있는가. 그랬던 사람이 지금 한나라당에 같이 몸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백번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 일이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지만 누추한 그의 초갓집을 찾아가 몸을 낮췄다.

하지만 박근혜는 이재오에게 분명히 잘못을 했고 큰 빚을 졌음에도 지금 묵묵부답으로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이재오가 지금 아파하고 있는 것은 2위를 했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길다면 긴 세월을 몸담았던 당이 아직도 자신을 '바깥'으로 보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안'의 사람으로 봤다면 '색깔론'을 꺼내 들이댈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며, 성심을 다해 '모신' 박근혜가 자신의 연설 도중 그렇게 방해를 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박근혜는 당장 이재오를 찾아 사과하고 또 사과해 마음을 풀어야 한다. 그것만이 이재오의 헌신에 보답하는 길이자 박근혜 자신이 승리하는 길이며, 자신이 이끌었던 당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소장파 한 의원은 강재섭을 향해 이재오에게 사과하라고 얘기했지만, 이번 갈등은 기본적으로 박근혜가 풀어야 할 숙제다. 그리고 그 핵심은 '정치적 관계'의 문제가 아닌 '인간적 신의'의 문제다.

박근혜의 정치 인생과 한나라당의 운명 전체가 지금 이 순간 결정되고 있다.

당장 짧은 시간 안에 드러나진 않더라도 긴 흐름 속에서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2006-07-14 오후 3:17:18 | ONnOFF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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