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떠나 경기도로…노숙자 '엑소더스' 심화

“여기서 자다간 얼어죽어요.” “달리 갈 데가….”
수은주가 영하5도 아래로 뚝 떨어진 22일 밤 11시께, 수원역 뒤쪽 과선교 인근에선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수원시 공무원 2명과 고엽제전우회 회원 등 4명으로 구성된 '노숙자 선도반'은 야간점검을 돌다 종이박스를 깔고 홑이불을 덮은 채 야외 팔각정에서 잠을 자려는 노숙자 A(35)씨를 발견했다.

“공짜 여인숙이 있으니 우리랑 같이 갑시다.” A씨는 길에서 주웠다는 이불을 주섬주섬 챙긴 뒤 선도반과 함께 승합차량에 올라탔다. 잠시 뒤 A씨가 내린 곳은 수원역 건너편 유흥가. 탐욕스레 번뜩이는 네온사인과 술 취해 흐느적거리는 직장인들을 뒤로 한 채 A씨는 옆구리에 이불을 끼고 일행과 함께 작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골목끝 J여인숙 2층 쪽방 네 칸엔 벌써 서너 명의 노숙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가 운영하는 '드롭인 센터'(노숙자 일일지원소)다. 전우회 관계자는 “요즘 노숙자가 갑자기 늘어나 매일 10명 안팎은 이곳에서 잠을 잔다”고 했다. 그는 “올들어 수원역을 24시간 무료개방하고 역앞 무료급식도 끼니마다 나온다는 정보가 돌면서 서울에서 전철타고 왔다가 아예 눌러앉는 사람도 꽤 된다”고 했다.

“주민등록번호 알아요?” 숙박부 기재를 위해 묻자 A씨는 “잘 모릅니다”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주소만 대신 쓸게요.” A씨는 숙박부에 '경남 하동'으로 시작하는 주소를 써내려갔다. “수원 오기 전엔 어디에 있었어요?” A씨는 이 시점부터 말문을 닫았다.

'70년생·경남' A씨가 이날 묵은 J여인숙 숙박부엔 '82년생·서울 노원구' B씨부터 '46년생·전남' C씨까지 아홉 명의 이름이 올랐다. 시 관계자는 “노숙자들 가운데는 부도를 내거나 신용불량인 사람들이 많아 신상정보를 밝히길 무척 꺼린다”며 “주소를 경기도라고 적은 사람도 사실은 다른 지역에서 온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올 겨울 경기도로의 '노숙자 엑소더스(exodus)' 현상이 심화되고 있어 도내 노숙자 대책에 빨간불이 켜졌다. '노숙의 메카'로 여겨져온 서울역·영등포 등지를 떠나 최근 경기도로 거취를 옮기는 노숙자들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수원역 대합실에서 만난 노숙자 D(42)씨는 “서울은 워낙 노숙자가 많아 줄서기 경쟁도 심하고, 요즘엔 60세 이하 노숙자에겐 급식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 이쪽으로 옮겨오게 됐다”고 했다. 또다른 노숙자 E(54)씨는 “처음 노숙자 생활에 접어든 초보들은 일단 서울로 가고 보지만, 한 두해 있다보면 워낙 치열하다는 걸 알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을 수용할 도내 지원시설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정부는 도에 매년 배정하는 노숙자지원예산을 내년엔 일부 삭감할 예정이다.

도 관계자는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지금으로선 난감하기만 한 상황”이라며 “서울시에서 일부러 그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몰려들고 있다”고 말했다.

2004-12-24 | 경인일보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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