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의 둔화세가 뚜렷해지면서 재정 확대 필요성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하지만 당장 '발등의 불'인 추가경정예산안 처리가 한 달째 공전하고 있는 데다, 소모적인 국가채무비율 논쟁까지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2.7%였던 우리 경제성장률의 올해 목표치는 당초 2.6에서 2.7% 사이. 하지만 지난달 한국은행이 2.5%, 또 21일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도 2.4%로 전망치를 하향조정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미중 무역갈등에 수출 의존도가 큰 우리나라로선 타격이 큰 데다, 제조업 구조조정에 따른 투자와 고용 위축까지 겹친 때문이다.
실제로 수출은 이달까지 6개월째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대들보 격인 반도체는 이달 들어서도 -33.0% 감소세를 보이고 있고, 전체의 26.8%를 차지하는 대중국 수출 역시 6개월째 줄며 이달에도 -15.9%의 저조한 실적을 나타내고 있다.
OECD는 한국의 올해 수출이 전년대비 0.5%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불과 3월만 해도 4.5%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두 달새 5.0%p를 하향 조정할 정도로 교역 상황이 나쁘단 얘기다.
다만 OECD는 "2020년부터는 확장적 재정정책 효과와 투자 회복에 힘입어 성장세가 잠재성장률 수준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 정부가 올해 지출을 9% 이상 확대하는 등 확장적 재정정책을 추진 중이며, 특히 이번 추경안이 경제활력을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면서 "만약 성장률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추가적인 재정을 통한 부양이 필요하다"고 재정 확대 정책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1분기에 -0.3% '역성장'을 기록한 결정적 원인도 정부 지출의 기여도가 지난해 4분기 1.2%에서 -0.7%로 크게 하락했기 때문이란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OECD와 IMF(국제통화기금) 같은 국제기구들은 물론, 국내 경제 전문가들도 확장 재정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고려대 총장을 지낸 서울대 이필상 초빙교수는 "재정지출을 확대해 미래산업 투자나 산업구조개혁, 중소·벤처기업 고용창출력 제고 등 경제를 구조적으로 살리는데 지출하고 투자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16일 열린 재정전략회의에서 '재정의 과감한 역할'을 수차례 주문하고 나섰지만, 엉뚱한 국가채무비율 논란만 커진 상태다. 국가채무가 GDP(국내총생산)의 40%를 넘기면 재정 건전성을 해칠 거란 비판이 제기되면서다.
정부 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올해 39.5%인 국가채무(D1)는 내년부터 40%를 넘어서게 된다. 또 2021년엔 41.1%, 2022년엔 41.8%로 높아질 전망이다. 이를 두고 일부 야당과 언론에선 '재정파괴'나 '경제파멸 정책'을 거론하며 공세 수위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40%'는 객관성도 실체도 없는 심리적 저항선일 뿐이어서, 논쟁 자체가 소모적이란 지적이다. 건국대 경제학과 최배근 교수는 "유로존이 출범할 때 회원국들에게 요구했던 '60%' 기준조차 산업화 이전인 18~19세기 개념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잦은 전쟁으로 군비 조달을 위한 국채 발행이 중요했던 당시 설정한 기준선일 뿐, '경제 체력'이 비교도 안되는 현대에 적용할 수준이 아니란 얘기다. 최 교수는 "심지어 아무 근거도 없는 40% 운운하는 주장은 국제사회에서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일각에선 '가파른 증가세'를 우려하기도 하지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부채를 합친 D1은 박근혜정부 초기인 2012년만 해도 32.2%였다가 정권 말기인 2016년엔 38.3%로 6%p 이상 올랐다. 현 정부 들어 지난해까지 2년 연속 38.2%로 줄었던 걸 감안하면, 2022년에 41.8%가 되더라도 상승폭은 3.6%p로 절반가량에 불과한 셈이다.
국제 기준으로 통용되는 일반정부부채(D2)는 이미 40%를 넘은 지 꽤 됐다. D1에 비영리 공공기관 채무를 합친 개념으로, 박근혜정부 말기인 2016년에 43.8%였다가 문재인정부 첫해인 2017년엔 42.5%로 소폭 감소했다.
그럼에도 233%인 일본이나 136%인 미국은 물론, OECD 회원국 평균인 115%에 비해서도 크게 낮은 수준이다. 재정 지출 여력이 충분하단 근거다.
최 교수는 '기축통화국인 미국이나 일본과는 경우가 다르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우리가 달러나 엔화로 국채를 발행한다면 고려해야겠지만, 원화 국채를 얘기하는데 억지논리를 갖다대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정작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핵심지표는 '국가채무비율'이 아니라 '조세부담률'이란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확장 재정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선 국채 발행을 넘어 근본적인 세입 확충, 바로 증세(增稅) 논의가 필수적이란 것이다.
충남대 경제학과 정세은 교수는 "재정 건전성을 지키겠단 이유로 경제 악화를 방치하면 분모인 GDP가 쪼그라들어 채무비율이 늘어나는 악순환만 계속될 수 있다"며 "GDP를 늘려 안정성을 유지하는 방안이 더 바람직하다"고 제시했다.
특히 "저출산 고령화와 양극화, 산업구조 고도화 등 구조적 도전과제들을 감안하면 증세를 병행해야 한다"며 "누진적 증세로 시작해 분배 개선이 이뤄진 뒤엔 보편적 증세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 나라의 지난해 조세부담률은 20.28%로, OECD 평균인 25.1%에 비해 여전히 적은 수준이다. 따라서 정부와 정치권이 적극적인 증세 로드맵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에 갈수록 힘이 실릴 전망이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오건호 공동운영위원장은 "증세 전략이 빠진 국가채무 관련 논의는 굉장히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며 "정공법은 세입확충인데도 증세 논의엔 소극적인 정부의 책임 역시 크다"고 지적했다.
'혁신적 포용국가'를 내세운 문재인정부가 자칫 박근혜정부에 향했던 '증세 없는 복지'의 부메랑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2019-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