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7월 한 국장급 고위 공무원이 뜻밖의 ‘돌출 행동’으로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서울시 시정개혁단장이란 중책을 맡고 있던 이 사람은 돌연 무급 휴직원을 내고 아파트 전세금 9000만원을 털었다. 그리곤 난데없이 온 가족과 함께 세계 여행 길에 올랐다.
떠나기 전 그는 “이 가족 여행은 지금까지 이뤄온 모든 것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고 했다. 주위의 소곤거림을 뒤로 한 채 그는 김포공항 하늘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그로부터 10개월. 배낭 하나 달랑 메고 1년 ‘고생’ 길에 올라선 이들 가족은 현재 중국·인도·아프리카·유럽을 거쳐 아메리카 인디언의 땅에 발 디딛고 있다. 추석 밤 둥근 대보름달은 열대 탄자니아의 한 국립공원 텐트 안에서, 21세기를 밝히는 첫 태양은 문명이 시작된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서 맞았다.
하루 20㎞ 이상 걷는 고된 여정 덕분에 요르단제 중고 등산화를 토종 발바닥에 길들여보기도 했다. 여행 닷새만에 아버지를 잃어버린 두 아들은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이국 거리를 헤매며 낯선 경험을 맛보기도 했다.
이들 가족은 이제 미주 일대와 오세아니아를 둘러본 후 동남아를 거쳐 귀국하는 2개월의 여정만을 남기고 있다. 토종 등산화도, 이국 땅의 지리도, 김포공항으로의 귀국도, 고향에서의 1년 기억도 잃어버린 그들이지만 배낭 위에 쌓인 전세계 곳곳의 흙먼지는 모든 보상을 대신하고도 남음이 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했던가. ‘시정개혁’을 맡았던 그는 우선 ‘가정개혁’에 성공한 듯 보인다. 미지의 세계를 함께 밟으며 쌓은 가족애와 추억의 편린들은 잔뜩 우러낸 녹차 향기처럼 두고두고 진한 여운을 남길 것임에 틀림없다.
철부지였던 아이들이 교과서 밖으로 뛰쳐나와 온몸으로 동서양 문명을 체험했다는 것만 해도 큰 재산이 될 터. 게다가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판단력까지 그들 일생의 수호천사를 자처하고 나섰으니 “모든 것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던 그의 호언은 정녕 허언(虛言) 아닌 셈이 됐다.
이제 다시, 그들 가족이 없던 1년 동안의 한국으로 눈을 돌려 보자. 긴 말 하지 않더라도 정말 수많은 사건들이 아웅다웅 좁은 땅 안에서 벌어졌다. 앞뒤도 뚝 자르고 교육 한 분야만 보자. 그들 가족에게 다가올 1년 후의 한국은 새삼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낄 만한 곳이리라.
치맛바람에 휘둘린 우리의 꿈나무들은 ‘비 바람 헤쳐나가는’ 본연의 나무이길 포기한 채 ‘온실 속의 화초’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나마 ‘왕따’ ‘과잉보호’ ‘불건전 정보’ ‘주입식 교육’ 같은 온갖 ‘농약’들이 화초들의 정상적인 광합성 작용과 성장마저 가로막는다.
지칠 대로 지친 ‘교육 난민’들의 ‘이민 엑소더스(exodus)’ 행렬은 2001년 한국 교육의 부끄러운 현주소를 이들 가족에게 잘 설명해 줄 것이다.
나폴레옹은 아홉 살 때 자신이 태어난 지중해 코르시카 섬을 떠나 프랑스의 한 유년학교에서 홀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한다. 또 아인슈타인과 빌게이츠의 성공 뒤안에는 어린 시절부터 잠재력과 창의성을 스스로 계발할 수 있게 도와준 현명한 어머니들이 버티고 있었다.
만약 이들이 요즘 아이들처럼 온실 속에서 과잉 보호로 자랐다면 인류 문명을 풍요롭게 만든 그들의 뛰어난 업적은 훗날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5월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이 끼어 있어 가족이나 교육의 의미가 더욱 남다르게 와 닿는 요즈음이기도 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군살만 붙는 아이, 자기만 챙기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아이, 소극적이어서 항상 자신감 없는 아이...
혹시 바깥의 거대한 태양은 모른 채 온실 속 백열등만 바라보며 크는 아이가 있다면 한번쯤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보내는 건 어떨까. 비행기도 좋고 기차도 좋다. 스스로 만나는 낯선 자연과 세계는 끊겨 있던 아이의 ‘마음 속 풍금’을 깊은 울림으로 끌어낼 테니까 말이다.
2001년 5월호 | 대한항공 사외보 '스카이라운지'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