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연말부터 담뱃갑에 부착될 흡연 경고그림의 위치를 놓고 정부가 '내분' 상태에 빠졌다.
보건당국은 금연 효과를 높이기 위해 상단에 배치하겠다는 입장인 반면,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규개위)는 담배회사 자율에 맡기라며 철회를 권고하면서다.
이에 보건복지부가 즉각 재심의를 요청하고 나서면서, 오는 13일 재심사를 위해 열릴 규개위 회의 결과가 주목된다.
당초 복지부는 지난 3월말 공개한 10종의 흡연 경고그림 시안을 6월말 최종 확정한 뒤, 오는 12월 23일부터 담뱃갑 앞뒤 상단에 30% 크기로 부착할 계획이었다.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란 경고문구까지 합치면, 앞뒤 모두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규개위가 보건당국의 이러한 계획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지난달 22일 열린 회의에서 경고그림의 상단 부착 의무화를 규정한 국민건강증진법 시행령 조항을 삭제하도록 권고한 것.
규개위 논리는 이렇다. "담뱃갑 상단에 경고 문구를 배치했을 때 흡연율을 포함해 어느 정도의 사회적 비용이 감소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 회의에서 한 민간위원은 "술도 해악이 큰데 왜 담배만 규제하느냐"며 "사회적 해악이 심대하다면 아예 담배 판매를 금지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취지로 발언했다.
또다른 민간위원은 "복지부가 발표한 경고그림이 혐오스러워 법 위반으로 소송 가능성이 있다"고 했고, "판매하는 종업원에게 심한 혐오감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는 발언도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위원 6명과 민간위원 17명으로 구성된 규개위에는 KT&G 사외이사를 지낸 인사를 비롯, 담배 소송에서 필립모리스코리아를 대리하고 있는 김앤장법률사무소측 인사도 포함돼있다.
복지부는 규개위의 이같은 권고에 불복해 즉각 재심의를 요청했다. 규개위의 판단과 달리, 경고그림이 상단에 있어야 금연 효과가 더 높다는 건 각종 연구에서도 입증됐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국가금연지원센터가 성인 61명을 대상으로 한 '시선 추적 조사'에서 경고그림이 담뱃갑 상단에 있을 때는 시선 점유율이 61.4~65.5%를 나타냈다. 반면 하단으로 내려갔을 때는 46.7~55.5%로 10%p 이상 뚝 떨어졌다.
복지부 관계자는 "경고그림 위치를 담배회사 자율에 맡기면 하단에 배치할 게 뻔하다"며 "편의점 등에서 진열대에 가리게 되는 걸 감안하면 시선 점유율 차이는 더 벌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보건의료 전문가 단체들 역시 "규개위 결정이 경고그림 도입 취지를 훼손했다"며 강력 반발하고 나선 상태다.
의협 김주현 대변인은 "세계보건기구(WHO)의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에도 경고그림과 경고문구를 담뱃갑 상단에 배치하도록 하고 있다"며 "다른 나라도 이 가이드라인을 지키고 있는데 우리만 자율로 했다간 유명무실화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교롭게도 우리 나라는 2013~2014년 FCTC의 의장국을 맡기도 했다. 의협은 "한국 정부가 비준한 국제협약을 스스로 위반하는 건 국제사회에서 국격을 떨어뜨리는 행동"이라며 규개위를 압박했다.
지난 2001년 캐나다에서 처음 도입한 담뱃갑 경고그림은 현재 전세계 80여개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대표적인 '비(非)가격 금연정책'이다.
캐나다의 경우 24%(2000년)이던 흡연율이 2006년엔 18%로 낮아졌고, 브라질 역시 31%(2000년)였던 흡연율이 경고그림 도입 이후 22.4%(2003년)으로 떨어진 것으로 보고됐다.
앞서 규개위는 정부가 담뱃세 인상을 추진하던 2014년 회의에서는 "국제협약을 고려할 때 적정성이 인정된다"며 FCTC를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담뱃값은 지난해 1월 1일부터 2천원씩 인상됐다.
하지만 이번 경고그림 위치를 놓고는 "FCTC 가이드라인까지도 굳이 지켜야 하느냐"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자가당착'이란 비판도 나오고 있다. 규개위가 각계의 반발 속에 다음주 있을 재심사에서 어떤 최종 결정을 내릴지 주목되는 까닭이다.
2016-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