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I식 검증'과 '우리가 남이가'

기소될 신세에 처한 대선후보가 내놨던 구호가 '가족 행복 시대'다. 밥먹듯이 늦게 귀가하는 통에 밥먹듯이 구받받는 필자로서는 명심 또 명심할 말인 듯도 하다 -0-;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퇴근후에도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는 걸 더 선호하는 부류들이 존재한다. 이른바 '우리가 남이냐' 족(族)이다(*이버 검색에 쳐도 나온다^^).

'남이냐'로 표준어화되긴 했으나, 그 원조를 거슬러보면 그 유명한 '남이가'가 될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 필자는 90년대 초반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군 복무 당시 연대장실 벽에 걸려있던 그 휘호 액자를 잊을 수 없다. 주먹보다 큰 붓으로 힘차게 써내려갔음이 분명해보이는 필체. 우 리 가 남 이 가. 한창 구르기 바쁘던 이등병 필자는 속으로 '그럼 남이지, 내가 니가' 하는 '영창감' 생각을 했더랬다.

원래 '우리가 남이가'는 도움을 준 주변 사람이 고마움을 표시할 때, 배려하는 차원에서 툭툭 던지던 좋은 말일게다. 그러나 1992년 12월 11일, '우리가 남이가'는 그 유명한 '초원복집 사건'을 통해 '반(半)국민적'이자 '반(反)국민적'인 유행어가 됐다.

"우리가 남이가?",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돼", "다른 사람이 되면 부산 경남 사람들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

대선을 사흘 앞둔 당시 법무장관을 비롯, 부산 지역 검찰 경찰 안기부 등 '사정기관 수장'들이 다 모인 자리였다. 비영남권이 일제히 들끓었지만, 영남권은 "우리가 남이가"를 매개로 강력히 결집했다. 결국 집권 후반 IMF 사태를 맞게 되는 YS가 당선됐다.

당시 복을 함께 먹던 인사들도 YS 정권 내내 복을 받았다. 부산경찰청장은 경찰청장을 거쳐 안기부1차장이 됐고, 지검장은 헌법재판관이 됐다.

지금은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된 정몽준 의원이 기소된 것도 그때였다. 도청 관계자에게 도피자금을 준 혐의였는데, 정 의원은 후일 "우리 나라가 법의 기본과 양식을 갖추고 있는지 지금도 의문스럽다"고 회상했다.

그 사건 이후 벌써 15년, YS가 DJ에게 정권을 내준 지 10년만에 다시 '초원복집'과 가까운 지역 출신 인사들이 대거 중용되는 분위기다. 검찰청장-경찰청장에 민정수석, 그리고 이제는 이름이 바뀐 국정원장까지 '사정기관 수장 빅4'가 모두 한 지역 사람들로 채워졌다.

'고 소 영'과 '강 부 자'가 아무리 회자되고 들끓어도, 15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가 남이가'인 것이다.

인사(人事)는 예로부터 '만사(萬事)'라 했다. 첫 조각(造閣)부터 '산산조각' 나고 있는 새 정부의 '부실 인사'를 놓고도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다.

하도 말이 많아지자,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FBI식 검증'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한다. 이번 인사 파문은 '검증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정보기관에서 몇 개월씩 정밀 검증하면 인사 논란도 없어질 것이란 기대감도 깔려있는 것 같다.

"기자들만 인내심을 가져주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도 한다. 하긴 한국 기자들은 인사 단독에 초 단위로 목숨을 걸기는 건다 -0-;;

청와대측은 이런 얘기도 했다. "FBI란 곳은 정치적 중립성이 담보되는 곳이어서 가능했지만, 지금까지의 우리 상황으로는 그런 시스템이 가능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동안 '권력의 시녀'라는 별명이 붙었던 곳이 어디 한두 군데겠느냐만, 지금까지의 국정원에서 과연 중립적 검증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회의론인 셈이다.

요약하자면 새 정부는 'FBI식 검증'을 도입해 '국정원식 검증'으로 인사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겠다, 정도가 될 터이다.

그런데 인사는 거꾸로 '우리가 남이가' 식을 강행하려 하니, 평소 기우 많은 필자로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인사'에 이어 '검증'도 '우리가 남이가' 시대로 흘러가지 않을까 해서다.

"참여정부가 인사 검증 협조하겠다고 했는데 왜 도움 안 받았냐" 물으니, 청와대측은 또 이런 얘기도 한다. "사람이 노출되고 인사 내용이 샅샅이 전해질텐데 그렇게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신뢰가 구축돼있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10년만에 정권이 바뀐 점을 양해해달라"고도 한다. 결국 믿지 못해 안 썼을 뿐, 시스템과 자료가 없던 건 아닌 것 같다.

국정원장 인사 직후 청와대는 "지역 안배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쪽에선 "우리가 남이가", 또 한쪽에선 "너희는 남이지"를 끊임없이 속삭이는 사회가 된 듯해 씁쓸하다.


2008-02-28 오후 5:18:18 | ONnOFF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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