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상주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게 도리 아니겠나".
지난 13일 오후. 정동영 열린우리당 전 의장은 '벌떼 같이' 달려든 캠프 참모들의 반대를 이 한마디로 일축했다. 측근들은 "하룻밤을 보내고 오시면 되지 않느냐"고 붙잡았지만, 정 전 의장의 생각은 달랐다.
정 전 의장은 이날 저녁 측근과 지인들의 만류를 뒤로 한 채, 곧바로 전주로 내려갔다. 숙부의 부음 소식 때문이었다.
전날 오랜 동반자이자 경쟁자였던 김근태 전 의장의 대선 불출마 선언으로 정국이 요동치던 시점, 다음날은 열린우리당의 진로가 결정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정 전 의장은 15일 오전 발인을 마칠 때까지 '여의도'와 250km 떨어져, 전주에 차려진 고인의 빈소를 밤새 뜬눈으로 지켰다.
다음날인 14일 오전 예정돼있던 시민사회세력의 정대화 교수, 오후 종교계 원로인 함세웅 신부와의 약속도 전격 취소했다. 이날 저녁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범여권 대선주자와 제 정파 대표가 모인 6.15선언 7주년 행사도, 이후 잡혀있던 김근태 전 의장과의 만찬도 참석을 취소했다.
끊임없이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내야 할 대선주자임에도, 그렇게 사흘 동안 뉴스의 중심에서 스스로 비켜나 앉았다. 지난 4월 중순 두 달간의 '탈(脫) 여의도' 행보를 마친 지 두 달만에 다시 사흘간의 '탈 정치' 행보를 보인 셈이다.
이번에 작고한 숙부는 정동영 전 의장에게 있어 '아버지'나 마찬가지라는 게 주변 지인들의 귀띔이다. 정 전 의장은 빈소에서 만난 기자들에게 "중고교 다닐 때 숙부님 밑에서 공부했다"며 "지병으로 애석하게 작고하셨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전주로 유학간 정 전 의장은 이후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근 7년간을 숙부 슬하에서 지냈다.
익히 알려진대로 정 전 의장은 6·25전쟁과 좌우 대립의 와중에 형 넷을 잃었고, 고교 2학년 때는 아버지를 잃었다. 정 전 의장은 자서전 '개나리 아저씨'에서 이러한 가족사에 대해 "어머니에게 있어 나는 장남이었고, 종손이었고, 남편을 대신하는 아들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이번에 작고한 숙부와는 한 차례 갈등을 겪은 뒤 앙금을 푼 사이기에, 정 전 의장의 안타까움은 더하고 있다.
고인은 지난 2004년 정동영 전 의장을 상대로 '학창 시절 먹이고 재워준 대가를 지급하라"며 소송을 냈고, 이에 법원은 "숙부에게 1천만원을 지급하라"며 화해 권고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후 정 전 의장은 숙부와 화해한 뒤 최근에도 종친회에 함께 다녀오는 등 관계가 남달랐다고 한다.
정동영 전 의장은 '정치적 격동기'에 생긴 50시간의 공백을 뒤로 한 채, 15일 저녁 KTX편으로 상경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최근 빙모상을 당한 중도개혁통합신당 최규식 의원을 위로하러 또다시 빈소로 달려갔다.
'정치적 실리'와 '인간적 도리' 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한 정동영 전 의장. 그러나 사흘만에 복귀하는 '현실 정치'는 김근태 전 의장과 비슷한 입지를 밟아온 그에게 또다시 선택을 강요할 전망이다.
정 전 의장이 망설일 지, 결단할 지는 현재로선 여전히 미지수다.
2007-06-15 오후 5:30:29 | ONnOFF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