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대한민국 파출소'만이 취객에 점령됐을까

술(酒)에 관대한 대한민국이라 했던가. 법치의 최전방인 일선 경찰서에서도 취객은 '왕'이요, 경찰은 '봉'이다. 변변한 제재 수단이 없어 경찰도 괴롭지만, 단순 취객들도 '범죄자'로 내몰리긴 마찬가지다. 공권력과 인권이 밤마다 동반 추락하는 현실과 그 대안을 5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주>

- 순서 -
①"경찰 나와!"…취객은 밤의 '무법자'
②'동네북' 전락한 지구대…밤이 두려운 경찰관
③눈떠보니 '전과자'…범죄 양산하는 '과잉잣대'
④미적대는 입법이 사회를 '술푸게' 만든다
⑤법집행과 인권보장의 줄다리기…그 해법은


일선 지구대를 점령한 심야 취객만 보면 대한민국은 마치 세계에서 가장 술을 많이 마시는 나라 같지만, 통계는 전혀 다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달 발표한 '헬스 데이터 2009'에 따르면, 15세 이상 국내 인구의 1인당 연간 평균 음주량은 8ℓ. OECD 평균치인 9.5ℓ보다도 낮다.

13.4ℓ인 아이슬란드를 비롯, 조사 대상 16개국 가운데 11위에 불과한 '소음국'(小飮國)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시는 나라들은 심야 취객 문제로 더 많은 골치를 앓고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선 주취자가 일선 경찰서를 찾아와 난동을 부릴 틈조차 없다.

주취자 격리 보호와 치료, 상담을 원스톱으로 해결하는 '주취해소센터'(Detoxification Center)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

미국 워싱턴DC의 경우 단순 주취자는 본인 동의하에 일단 귀가시키고, 거부하면 곧바로 체포해 보건복지부가 운영하는 주취해소센터로 후송한다.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는 주취자 역시 이곳에 보내진다. 응급치료가 필요한 만취자는 병원에 후송해 치료를 받도록 하고 있다.

캐나다 마니토바주 역시 똑같은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주취해소센터로 지정된 병원이나 지역 보호시설에 보내 24시간 한도에서 보호 조치한다.

'훌리건의 나라' 영국은 훨씬 엄격하다. 주취소란 및 난동자는 죄질에 관계없이 체포, 경찰서내 유치장에 36시간까지 구금한다.

싱가포르도 병원 응급실에 경찰초소를 따로 마련, 일단 주취자를 격리 보호한 뒤 법적용 여부를 결정한다.

주취자가 파출소 의자에서 자다 굴러 떨어져도 경찰이 책임을 져야 하는 우리와 달리, 호주와 캐나다는 주취자 처리 과정에서 발생한 손해에 대해 면책조항을 두고 있다.

또 프랑스의 경우 경찰 제지에 따르지 않는 주취자에 대해 3천 유로(약 425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고 있다.

결국 심야 취객들이 '범죄자'로 비화하는 걸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초기 단계에서의 '격리 보호'와 벌금 상향 등 '엄격한 기준' 마련이 필수적이란 얘기다.

실제로 북미 시스템을 일부 적용해 지난해 7월부터 시범 실시중인 부산의 '상습 주취소란자 치료보호 프로그램' 경우 전문가들의 긍정적 평가를 얻어내고 있다.

경찰이 상습 주취자를 병원에 후송해 응급처치를 받게 하고 술이 깰 때까지 지켜보다가, 알코올 중독자는 정신과 치료 등 전문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한 프로그램이다.

현재 부산경찰청 소속 52개 지구대와 36개 파출소에서 실시되고 있으며, 63명의 주취자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응급 치료를 받았다. 또 이 가운데 정도가 심한 25명은 정신병원에서 완치됐거나 치료중이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처음 도입한 김중확 경찰청 수사국장은 "상습 주취 소란자는 공권력 도전 세력이 아니라 치료 대상"이라며 "근본적 치료를 통해 건강한 사회인으로 재활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경찰청도 올해 이 프로그램을 전국적으로 확대 추진하려 했지만, '뜨거운 감자'인 인권 침해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국가인권위원회 부산사무소 이광영 소장은 "본인 또는 보호자 2인 이상의 동의가 없다면 정신병원 이송은 공권력 남용에 해당할 수 있다"며 "현재로선 동의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우선은 가족에게 인계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한 조치"라며 "주취자가 존중, 보호되는 틀안에서 프로그램이 시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도 "주취 여부를 판단하는 단계부터 주관적,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며 "경찰은 대국민 서비스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공권력 유린'과 '취객 인권 침해'를 동시에 막기 위해서는 일선 경찰서에서 일단 주취자를 '분리'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장기훈 대리는 "주취자 문제는 보호와 치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행정기관과 지역사회, 의료기관이 연계해 보호 시설을 만들어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술 취한 사람은 정상적 의사결정과 판단이 어려워 위험에 노출돼 있다"며 "전문적 의학 지식은 의사가 제공하고 지자체는 휴식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주취자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일단 지구대나 파출소가 아닌, 전문적 지식과 치료 능력을 갖춘 '제3의 장소'에서 술이 깰 때까지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 '정확한 진단'과 '본인 동의'를 전제로 재활 프로그램을 연계시키는 것이 인권 문제나 사회복지 차원에서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물론 지방지차단체와 의료기관의 대승적 인식 전환, 또 중앙정부와 입법부의 행정적 제도적 지원도 절실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취객'과 '공권력' 스스로 이제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끝>.


2010-05-18 오후 4: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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