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감사실에 근무하는 A(42)씨는 최근 서울 을지로에서 밤 늦은 시간 만취 상태로 택시를 탔다가 뜻밖의 상황에 직면했다.
"영등포에 가자"고 했지만 기사 B(45)씨는 "인천 택시여서 안된다"고 승차를 거부했다. 감정이 격해진 끝에 욕설과 몸싸움이 오가던 중 B씨가 인근 경찰서에 A씨를 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B씨는 특히 실랑이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녹음된 음성 파일을 증거물로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A씨 모르게 실내 모든 상황이 녹음되고 있던 것.
'택시용 블랙박스'(영상기록장치)가 승객이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당초 목적과는 다르게 이용되면서 '사생활 침해' 우려를 낳고 있다.
택시 블랙박스는 차량 전방이나 후방을 동영상으로 실시간 촬영 녹화함으로써, 교통 사고시 상황과 속도 및 위치 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설치된 장치다.
지난 2008년 인천광역시에 처음 도입돼 5,300여대에 설치 운영중이며, 경기도에 이어 서울시에도 두 달전부터 법인 택시를 중심으로 설치되기 시작했다.
서울시택시운송조합 이희준 업무부장은 "현재 법인택시 2만 2,800대에 블랙박스가 설치됐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승객들이 이같은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는 데다, 이를 규제할 관련 법규도 전무하다는 것.
특히 회사에서 설치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법인택시와는 달리, 개인택시의 경우에는 설치 여부조차 확인할 길이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블랙박스를 최초 도입한 인천의 경우 승객들이 설치 여부를 알 수 있도록 '차량용 영상저장장치가 전방을 녹화하고 있다'고 적힌 스티커를 부착하게 했다.
물론 이 또한 강제사항이 아닐 뿐더러, 녹음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인천택시공제조합 노종철 차장은 "법인 택시의 경우 음성을 녹음하지 못하도록 내부 스위치를 'OFF'로 설정해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부 기사들은 그러나 현장 상황을 들어 '음성 녹음' 활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개인 택시 기사 C(48)씨는 "야간 취객이나 무전 승객과 시비가 붙었을 때 이만큼 효율적인 방법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승객 몰래 녹음'이 사생활 침해나 명예 훼손 등의 부작용을 불러올 개연성이 높다는 점에서, 관련 법규 및 고지 제도의 정비가 시급한 상황이다.
2010-04-27 오전 10: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