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핵(核)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당장 2016년 고리 1호기를 시작으로 원전(原電) 임시저장 시설마다 포화 상태를 맞게 될 '사용후 핵연료' 때문이다.
사용후 핵연료는 말 그대로 원전에서 사용하고 남은 연료. 국내서는 23기 원전에서 매년 700~750톤씩 생겨나고 있다. 미봉책인 '조밀랙'으로 더 촘촘하게 저장해봤자 2024년까지는 모든 시설에 꽉 들어찬다.
1990년 안면도, 1995년 굴업도, 2003년 전북 부안 사태의 원인이 된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과는 성격이 다르다. 방사능 강도는 훨씬 높지만 단순한 '폐기물'이 아닌, 재활용할 수 있는 '2차 자원' 성격을 띠고 있어서다.
◈쓰레기인가, 고효율 자원인가
"사용후 핵연료는 96%를 재활용할 수 있다. 부피를 줄여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어 폐기물 처분 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
프랑스 파리 북서쪽 노르망디 해안 인근의 라하그(La Hague) 지역. 1966년 처음 이곳에 들어선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관리하는 '아레바'(AREVA)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그냥 처분할 게 아니라 재처리를 거치면 25%의 천연 우라늄을 비축할 수 있다"며 "최종 고준위 폐기물의 부피는 1/5, 독성도 1/10로 줄일 수 있어 효과적"이라고 했다.
채광을 통해 얻는 천연우라늄은 0.7%의 '우라늄 235'와 99.3%의 '우라늄 238'로 이뤄져있다. 이를 정제하고 농축해 우라늄 235 비중을 2~5%까지 높인 핵연료 다발은 원자로에서 핵분열의 원료로 쓰인다. 95%까지 농축하면 핵무기가 된다.
원전에서 사용된 핵연료는 라하그 재처리 시설 안에 마련된 9m 수심의 '중간 저장' 수조로 옮겨져 냉각된다. 국내 원전의 '임시 저장' 시설과 같은 원리다. 보통 3년, 최대 10년간 저장해뒀다가 재처리 절차에 들어간다.
◈"사용후 핵연료, 96%는 재활용 가능"
발전 과정에서 사용되는 핵연료는 불과 4%. 사용후 핵연료는 여전히 1%의 플루토늄과 95%의 우라늄을 보듬고 있다. 사용후 핵연료 8개를 재처리하면 대략 우라늄 1개와 목스(MOX) 원료 1개를 만들 수 있다.
우라늄과 플루토늄이 섞인 목스 원료는 프랑스나 일본 경우처럼 경수로나 고속증식로에서 사용된다. 또다른 아레바 직원은 "1그램의 플루토늄과 100그램의 우라늄만 있으면 1톤의 석유를 투입해야 나오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력의 75% 이상을 원전에 의지하는 프랑스에서 아레바는 지금까지 3만 톤 넘는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했다. 연간 처리능력은 1700톤에 이른다.
재처리까지 마치고 남은 최종 고준위 폐기물은 유리 성분을 섞어 고화시킨 뒤 라하그 내부의 '임시 처분소'에 6~7년 보관된다. 이곳마저 꽉 차면 마지막으로 옮길 '영구 처분 시설'은 아직 논의가 진행중이다.
◈150m 점토암층에 '영구처분' 유력
지난 1993년 490m 지하층에 관련 연구시설이 마련된, 파리 남동쪽 생디지에 인근 도시인 뷰흐(Bure)가 일단 유력하다. 방사능 차폐에 유리한 150m 두께의 점토암층이 형성된 지역으로, 현재는 100여 명의 주민만 인근에 거주하고 있다.
환경단체 반발 등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최근 단일 후보지로 선정돼 최종 승인만을 남기고 있는 상태다. 시설 운영을 맡은 '안드라'(ANDRA) 관계자는 "오는 2020년쯤 최종 승인이 나면 향후 120년간 15㎢ 규모로 방사터널 형태의 처분장을 파나가게 된다"고 설명했다.
오는 2040년까지 프랑스내 원전 58곳의 모든 폐기물을 면적 절반에 보관할 수 있는 규모로, 언제든 다시 꺼낼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안드라측 또다른 관계자는 "120년 사이에 기술 발전에 따라선 이미 처분된 폐기물을 다시 빼낼 개연성도 있다는 걸 감안했다"고 했다.
◈영구 처분 놓고 프랑스는 '진통중'
오랜 원전 강국인 프랑스이지만, 핵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긴 우리와 마찬가지다. 안드라 건물앞 횡단보도에 페인트로 적힌 'Bure Stop!'(뷰흐 유치 중단) 등의 항의 문구가 이를 증명한다.
지역 선정을 위한 공론화 작업을 주도했던 끌로드 베르네 공공토론특별위원장은 "프랑스에서 원자력은 군사적 자립과 에너지 자립의 핵심"이라며 "원자력의 역사도 길기 때문에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비하면 국민적 반감이 덜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준비 기간 6개월, 국민토론회 4개월, 결과 정리 2개월을 상정하고 시작했지만 넉 달이 추가 소요됐다"며 고충을 털어놨다. 당초 15번으로 계획됐던 지난해 토론회 역시 주민 반발 등에 부딪혀 9번의 TV토론으로 대체됐다.
현지에서 만난 앙투안느 제라르 뷰흐 시장은 "폐기물은 우리 지역에서 감수해야 되는데 반대급부는 당초 생각보다 크게 적다"며 "한국 국민들에게는 '상당히 조심해야 한다, 밀가루 반죽를 뒤집어쓰지 말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고 강한 반감을 표시했다.
◈'발등의 불' 대한민국…지역 선정이 '최대 난제'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만 근 50년, 영구 처분 시설 논의도 이미 20년을 훌쩍 넘긴 프랑스 상황마저 이렇다. 대한민국의 현실은 이에 견주기조차 힘든 실정이다.
당장 어떤 방향으로 결정하든 지역 선정이 최대의 난제가 될 수밖에 없다. '재처리', '중간저장', '영구처분'까지 그 어느 하나 시설도 전무한 데다, 관련 연구조차 선진국들에 크게 뒤쳐져 있기 때문.
현재로선 기존 원전의 임시 저장 시설을 확충하는 방안이 '임시방편'으로 거론되지만, 해당 지역 반발은 불가피하다. 최근 한 민간 건설업체가 경북 울진 지역에 '사용후핵연료 처분 지하연구시설'을 제안했다가 구설수에 휘말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내후년 포화 상태를 코앞에 두고 지난해 출범한 사용후핵연료공론화위원회는 올 연말까지 활동한 뒤 정부에 권고안을 낼 예정이지만, 국민적 공감대를 이끌어낼지는 미지수다. 이해관계나 가치관이 워낙 첨예하게 엇갈려서다.
◈우라늄 농축-재처리권 확보 여부도 '관건'
가령 1956년과 1974년 잇따라 맺은 한미원자력협정에 따라 국내에선 금지된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 문제를 놓고도 의견이 분분하다.
"경제성이 그리 높지 않을 뿐더러, 핵무기 전용 가능성에 대한 국제적 우려를 볼 때 재처리 도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일단 빼고 생각하자"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 의견도 팽팽하다.
국내 한 원자력 전문가는 "2016년 3월 협정 만료를 앞두고 한미 양국이 현재 개정 협상중인 만큼, 이번만큼은 재처리 권한을 얻어내 '핵 주권'과 '에너지 주권'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며 "기술적으로도 그리 어렵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원전 도입 이후 37년째 전력의 25%이상을 의존하고 있지만, 천연 우라늄 역시 전량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자원 빈국'의 현실도 거론된다.
권한이 없어 연간 1조원을 주고 외국에서 농축해 들여올 뿐더러, 천연 우라늄 가격이 고갈로 급등할 경우 재처리조차 못하는 현실에서 막대한 국부 유출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반감기 최대 수만 년…미래 후손까지 영향
더욱 주목할 것은 짧게는 수백 년에서 길게는 수만 년에 이를 방사능 반감기다. 이번에 결정할 사용후 핵연료의 처리 방안이 까마득히 먼 미래 인류에게까지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후대가 보기에 '조급하고 근시안적인 결론'을 남기지 않으려면, 긴 안목으로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어떻게 꺼야 할지도 결정하기 어려운, 진퇴양난의 낭떠러지에 몰린 셈이다.
공론화위원회 관계자는 "현재로선 불가능한 모든 가능성까지 테이블에 올려놓고 논의를 진행할 계획"이라면서도 "사안의 중대성에 비해 공론화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2014-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