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니 점심시간"…직장인 이씨의 '악몽같은' 하루


"출근하니 점심시간이더라. 전철도 늦으면 뭘 믿고 타나".

수원시 장안구에 사는 직장인 이모(38)씨에게 사상 최대의 '수도권 폭설'이 내린 4일은 악몽과도 같은 하루였다.

매일 1호선 전철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그는 이날도 어김없이 아침 6시 눈을 떴다.

성균관대역에서 영등포역까지 40분만에 주파하는 서울역행 급행열차를 타려면 늦어도 7시 20분까지는 역에 나가야 하기 때문.

영등포역에 내려 택시를 타면 그가 근무지인 국회의사당에 도착하는 시간은 보통 오전 8시 10분쯤이다.

'새해엔 더 부지런하게 살아야지'라는 다짐에 5초 남짓 걸렸을까. 발코니로 들어오는 새하얀 광채에 그는 이내 '사태'를 직감했다.

"장난 아니게 많이 왔구만". 이씨는 전날밤 지상에 세워놓아 10cm쯤은 높아진 승용차를 지하주차장에 재빨리 옮겨놓고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냅다 달렸다.

다행히 버스를 잡아탔지만, 평소 5분이면 눈앞에 나타날 전철역은 30분이 지나도 등장할 낌새가 없다.

"그냥 여기서 내려주세요". 운전사를 재촉해 하차한 이씨와 20여명 가량의 승객들은 15분가량 미끄러운 눈길을 뛰어 전철역에 도착했다.



가드레일을 받은 채 비상등을 켠 승용차들, 그다지 언덕도 아닌데 버거워하며 공회전중인 트럭들이 도로 곳곳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역시 차를 안 갖고 나오길 잘했지". 하지만 뿌듯함이 산산조각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급행 열차는커녕, 3~4분마다 한 대씩 와야 할 일반 열차도 아직 '평택'에 머물러있었다. 10분여 기다린 끝에 온 열차도 장마철 만난 콩나물 시루마냥 발디딜 틈없이 빽빽했다.

그나마 뻔히 보이는 고통 속에도 이씨가 전철에 몸을 맡긴 건 제 시간에 도착할 거란 '오랜 믿음' 때문.

하지만 다음 역인 군포에서 10분간 정차한 열차는 그 다음 역인 의왕에서도 또 10분 정차하는 식으로 오랜 신뢰를 깨버렸다.

열어놓은 문으로 눈보라가 들이치는 가운데 울려퍼지는 안내 방송은 분위기를 더욱 싸늘하게 만들었다.

"중부지방에 내린 폭설로 운행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바쁘신 승객들은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마당에 다른 교통수단이라니'라는 생각 따위는 할 틈도 없다. 생존 그 자체를 위한 '숨쉴 틈'조차 찾기 힘든 승객들의 표정은 한층 일그러졌다.

직장 상사 동료들에게 '해명성' 긴급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나니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까지 든다. 이씨는 옆사람들의 표정에서도 여지없이 '포기'를 읽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평소 오전 8시쯤 도착했어야 할 영등포역 표지판이 온통 하얀 배경의 차창밖에 나타났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가 넘었다.

5호선 환승역인 신길에 내려 여의도까지 한 정거장을 간 뒤 9호선을 갈아타고 국회의사당역에 내렸다.

3시간 넘게 '눈폭탄과 1호선'에 시달린 이씨에게 서울 도심의 '지하철'들은 그저 천국처럼 느껴졌다(나중에 뉴스를 본 이씨는 도심 지하철들도 '지옥'였음을 알았다).

연말연초 '지옥' 같던 국회에도 무슨 일 있었나 싶게 온통 눈꽃이 만발했다. "이제 점심먹고 퇴근하면 되겠네". 오전 11시 30분 도착한 이모씨에게 직장 상사 동료들이 농담삼아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이씨의 머릿속에 이미 '새해 각오' 따위나, 조금전 인터넷 뉴스 검색으로 읽은 "(눈이 올 때는) 지하철을 타면 된다"는 '나랏님 말씀' 등등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정말 잘 퇴근할 수 있을까', '서울역에서 금천구청역까지 1호선 운행이 중지됐다고?', '내일 아침엔 이렇게나마 출근할 수 있을까' '아, 빨리 서울 사는 수밖에' 따위의 잡생각들이 스쳐갔다.

이런 그의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눈은 이날 오후 2시 이미 서울 지역 최대 적설량인 41년전의 25.6cm를 갈아치웠다.

2010-01-04 오후 4: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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