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라이벌' DJ-박정희, 이웃에 묻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양대 기둥'이자 '최대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후(死後)에는 '이웃'으로 영면하게 됐다.

김 전 대통령의 장지가 박 전 대통령의 묘소가 있는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으로 확정됐기 때문.

이곳에는 또 6.25전쟁 당시 DJ가 정계 입문을 결심하게 만든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됐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묻혀있어 '역사의 아이러니'를 실감케 하고 있다.

◆현충원 "DJ 묘역, 국가유공자 묘역 하단에 조성"

국립서울현충원 정진태 원장은 20일 브리핑을 갖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을 현 국가유공자 묘역 하단에 조성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서울현충원 정진태 원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김 전 대통령의 유가족과 행정안전부와 협의한 결과 서울현충원의 국가유공자묘역 하단부에 김 전 대통령의 묘역을 조성키로 했다"고 밝혔다.

정 원장은 "유가족이 묘역을 최대한 소박하고 검소하게 친환경적으로 조성해달라고 요청했다"며 "국립묘지설치법에 따라 봉분과 비석, 상석, 추모비 등을 합해 80여평(16mⅹ16.5m) 규모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현충원은 오는 22일까지 봉분 조성과 진입로 개설 등을 마치고 영결식이 있는 23일까지 모든 작업을 마무리할 방침이다.

김 전 대통령이 안장될 묘역 인근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조선 중종의 후비인 창빈안씨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반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내외의 묘소는 남서쪽으로 상당 거리 떨어진 장소에 위치해 있다.

◆한국 현대사의 '최대 악연'…결국 동작동서 '해후'


김 전 대통령이 두 전임 대통령,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작동에 나란히 영면하게 된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두 사람의 관계는 한마디로 '저항과 탄압'이란 말로 요약된다.

두 사람 다 거의 비슷한 시기 한국 정치사에 등장했지만 DJ는 박정희 체제에서 최대 정적이었고 이로 인해 끊임없이 탄압을 받아야 했다.

DJ가 정치권에 본격 등장한 것은 1961년 5월 13일 치러진 인제 재보궐 선거에서 민의원에 당선되면서다. 1954년 목포 민의원 선거 이후 3번의 고배를 마신 끝에 비로소 국회에 입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의원 선서조차 못하는, 비운의 정치인이 되고 만다. 당선 3일 뒤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5.16 쿠데타를 감행하고 18일 국회를 해산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10년 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숙명적 대결로 맞붙었다.

김영삼 후보를 이기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된 DJ는 줄곧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을 허용하면 이 나라는 영원히 선거없는 총통 시대가 올 것"이라며 분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패배. DJ는 539만표를 얻어 634만표를 얻은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의문의 교통사고 이어 도쿄 납치사건까지


대신 그는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돼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데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DJ는 교통사고로 골반을 크게 다쳤다. 교통사고를 가장한 테러로 알려진 이 사고로 그는 평생 불편한 걸음걸이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급기야 그의 '경고' 처럼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당시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DJ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으로 망명, 유신 반대 투쟁에 돌입했다. 도쿄에서는 유신 반대 첫 성명이 발표되고 워싱턴에서도 국민 투표 무현 선언이 발표됐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공작정치로 일컬어지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1973년 8월 8일 DJ는 도쿄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당시 일본을 찾은 양일동 통일당 당수와 김경인 의원을 만난 뒤 한국 중앙정보부원들에게 납치됐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지고 팔다리에는 무거운 추가 달린 채 현해탄에서 수장될 뻔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일본 해상자위대의 추격 등으로 그는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 한국으로 강제 귀국됐다.

이 사건은 한일간 외교 갈등으로 비화됐지만 진상이 밝혀지기까지는 무려 34년이 더 걸렸다.

2007년 10월 국정원 과거사건 진상규명 위원회는 "이 사건은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고 사건 이후 중앙정보부가 조직적으로 진상을 은폐하려 했다"고 밝혔다.

특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최소한 묵시적 승인이 있었다"고 밝혔다.

◆DJ, 박근혜 사과에 "응어리 풀어지는 듯"


구사일생 목숨은 구했지만 이후에도 DJ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귀국 직후 자택 연금으로 정치활동이 금지 당한데 이어 1976년 재야 민주 지도자들과 명동 3.1 민주 구국 선언을 주도했다가 구속되는 등 가택연금과 투옥을 반복했다.

그러다 1979년 10.26 사건이 발생, DJ와 박정희 대통령간의 저항과 탄압의 악연은 18년 만에 끝이 났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나고 2004년 8월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DJ에게 "아버지 시절 여러가지 피해를 입으셨다"며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에 대해 DJ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마음 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김대중과 박정희, 이 두 전직 대통령은 살아 생전 어떤 화해나 용서도 하지 못했다. 다만 산 자와 죽은 자의 간접 화해가 이를 대신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동작동에 나란히 묻혀 역사의 평가를 함께 기다리게 됐다.

2009-08-20 오전 11: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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