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미봉남' 이어 '통민봉관'…정부 '역할 고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면담 결과는 가히 '정상회담' 성과를 방불케 하고 있다.

정부가 중단시킨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기로 합의하거나, 현대그룹의 '당면 현안'도 아닌 이산가족 상봉 재개에 합의한 것은 사실상 정부의 암묵적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사안들이다.

17일 귀환한 현 회장이 정부의 '대북 특사'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에 정부는 여전히 "민간 차원의 합의일 뿐"이라고 선을 그으면서, 역설적으로 정부의 역할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현 회장이 김 위원장과 '통 큰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정부가 한 일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 설명대로라면 이번 합의문 도출 과정에서 맡은 역할이라고는 '방북 연장 도우미'에 불과하다는 비아냥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당장 수면 위에는 뭐가 안 보여도 물밑에는 수많은 물갈퀴질이 있다"며, 정부도 물밑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했음을 애써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이같은 언급 역시 지난 4일 현정은 회장이 리종혁 아태위 부위원장을 만나 '평양행' 일정이 가시화된 이후 나온 것이어서, 빈축을 사고 있다.

당시 4차례의 정부 당국간 실무 접촉에도 현대아산 직원 유성진씨 석방에 전혀 진전을 보이지 못한 채 손놓고 있던 상황인 터라, 결국 민간 부문의 협상 성과를 '정부의 공'으로 돌리려 한 셈이 되기 때문.

실제로 유씨 석방을 위한 '물밑' 움직임에서도 정부의 역할은 사실상 눈에 띄지 않았다. 7월초 중국 선양에서 북한 보위부 인사들과 만나 사전 협의에 나선 것도 현대아산 서예택 관광경협본부장 일행이다.

이 시기 정부가 한 일이라곤 대북지원단체들의 방북 제한을 단계적으로 푼 것이나, 인도적 대북 지원 사업에 대한 남북협력기금 지원을 결정한 정도다.



그러나 이마저도 관련 국내 민간단체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함에 따라 할 수 없이 제한적으로 나선 성격이 짙다.

앞서 유명환 외교부장관도 ARF에서 유씨 석방 문제를 공식 제기하겠다거나 유엔 인권위에 회부하겠다는 등의 '압박성' 발언만 내놨을 뿐, 협상 진전에 도움이 될 만한 정부 차원의 언급은 사실상 전무했다.

처음부터 줄곧 상황이 이랬으니, 지금 와서 정부가 앞에 나서기도 곤란한 측면이 있다. 민간 부문에서 '덜컥' 굵직한 선물들을 받아내온 만큼, 정부로서는 낯이 서지 않게 된 것.

정부가 계속 "민간 차원 합의"라며 '선 긋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다. 북한이 '민간 채널'을 통해 넘겨온 공을 우리는 '정부 차원'에서 정색하고 받아쳐 넘길지를 일단 결정해야 한다.

이명박정부 들어 북한이 채택해온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번 합의문 도출에도 남북관계 경색이 쉽게 해소될 지는 미지수란 것이다.

북한이 사실상 정부 대신 '현대'를 협상 파트너로 선택한 것은 '통미봉남'의 연장선인 '통민봉관'(通民封官)으로 봐야 한다는 분석도 많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방북 이후 '북미 직접 대화'에 주력하고 있는 북한이 현실적 필요를 위해 남측에 유화 제스처를 보냈을 뿐, 당국 차원의 '통미통남' 의지로 해석하긴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이번 합의문을 안 받자니 '남북경색의 원인 제공자'로 몰릴 수 있고, 덜컥 그대로 받자니 면도 서지 않는 일종의 '딜레마'에 처하게 됐다.

이같은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또 어떤 '물갈퀴질'을 시도할 지, 아니면 '선 긋기'를 중단한 채 본연의 주도적 위치에서 남북 관계 개선에 나설 지 주목되는 까닭이다.

2009-08-17 오후 3:5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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