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국으로 만난 '일자리 어르신'과 '독거 어르신'
지난 28일 서울 중랑구 구립신내노인종합복지관에서 만난 길홍연(75) 할머니는 70대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씩씩하고 정정했다.

마침 날이 풀려 포근했던 이날 오후, 길 할머니는 보온병과 반찬통을 담은 바구니를 능숙하게 챙겨서 복지관을 나섰다.

"할아버지는 가끔 집에 없던데, 그러면 봉지에 담아서 문고리에 걸어 놓고 와야 돼."

길 할머니는 1년 넘게 다녀 익숙해진 길을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반찬을 받을 할아버지가 집에 있을지, 지난번에 배달한 반찬은 다 챙겨 드셨을지 혼잣말로 꼼꼼히도 신경쓰면서.

길 할머니는 아름다운재단이 지원하는 독거노인 국 배달 사업의 '일자리 어르신'이다. 1주일에 두 번, 버스를 타고 중화동에 사는 독거노인을 찾아 따뜻한 국이 담긴 보온병과 밑반찬을 배달한다.

◈ "가족이 있든 없든, 늙어가면 다 똑같은 입장이지…"

복지관을 드나들던 길 할머니가 '일자리 어르신'으로 채용된 지도 이제 2년째다. 독거노인들에게 국 배달 봉사를 하면서 한 달에 20만 원 급여를 받는다.

60대까지도 아이 돌보미 일을 하며 활동적으로 살았던 길 할머니. 그러나 2년 전 누구보다 건강했던 남편이 별안간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부터 일을 그만뒀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점점 맥이 빠졌다. 아랫집에 아들 내외가 살지만, 사실상 1주일에 한 번 얼굴을 보기도 힘들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가족 없이 홀로 사는 동년배 노인들을 찾아 반찬을 배달하기로 했다.

"자식이 있어도 다 혼자 사는 세상이지. 가족이 있든 없든 우리 다 똑같은 거예요."

길 할머니와 함께 첫 번째로 찾은 집은 정상범(73.가명) 할아버지가 사는 중화동의 작은 지하방.

방바닥을 밟자마자 발에 차가운 기운이 전해졌다. 볕 안 드는 한 칸 방 안에는 오래된 전기담요 한 장이 깔려 있었다.

사회복지사 오승미(29) 씨는 "복지관에서 난방비를 지원한다고 해도, 일반 가정의 1/10 수준인 1만 원대로 나오는 집이 허다하다"고 귀띔했다.

최저생계비로는 한 달에 단돈 몇천 원도 더 쓰기 어렵다는 걸 잘 아는 노인들이 아예 난방을 때지 않아서다.

"명절에 아드님, 따님 안 오세요?" 길 할머니가 묻자, 정 할아버지는 조용히 벽을 가리키며 "큰아들만 하나 남았는데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 한 통도 없다"고 한다.

누렇게 뜬 벽에는 젊은 남자 사진이 걸려있었다. 20년 전 '아버지, 몇 년 동안 돈 많이 벌어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선 뒤 소식이 끊긴 둘째 아들이다.

길 할머니와 정 할아버지는 이웃사촌지간이다. 두 사람 모두 칠십 평생에 부모님 세대까지 더해, 대대손손 노원구와 도봉구 등지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길 할머니가 "할아버지 누님이 토끼띠면 나랑 한 살 차이니까 초등학교 때 마을 동무였을 거여"라며 깔깔 웃자, 웃음기 없던 정 할아버지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정 할아버지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살뜰하게 챙기는 것도 길 할머니의 몫이다. 정 할아버지는 4년 전 과일을 따러 올랐던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허리뼈 4개를 부러뜨렸다.

"이 나이가 되니 4년이 지나도 뼈가 안 붙어, 진이 안 나오니까" 철심을 박는 수술을 했는데도 완치가 안 됐다. 발가락은 흉하게 굽어 버렸다.

"뭣하러 나무에는 올라가셔서 그래 그러게" 정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할아버지 발을 세심히 들여다보고 최근에 더 안 좋아지는 데는 없는지 살펴봤다.

설날 특식이라고, 이날은 따뜻한 들깨버섯국에 떡국 떡과 만두가 함께 배달됐다.

"꼭 떡이랑 만두 넣고서 맛있게 끓여 진지 잡수시라"고 재차 말하는 길 할머니에게 정 할아버지는 또 "맨날 고생이네…"라고 화답했다.

이정미(87.가명) 할머니도 길 할머니의 방문 대상자다.

지난번 '복지재단 시설로 들어가야 할까 보다'라며 걱정하는 이 할머니에게, 길 할머니는 "아주머니, 혼자서 진지 꺼내서 못 잡수시게 되면 그 때 들어가시라"고 말했다.

"아주머니나 우리나, 몸 못쓰게 되면 언젠가 들어가야 할 곳"이라고 말해준 길 할머니 덕에 이 할머니는 한결 맘이 편해졌단다. 가족들에게 짐이 되기 싫으면서도 시설행을 권한 딸에겐 내심 섭섭한 맘이 들었었다.

길 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자식의 부양이 당연한 시대가 아니라고 말한다. 가족 없는 노인이라고 불행한 노년의 표상이 될 건 결코 아니라는 것.

"자식이 한 동네에 살든 미국에 살든, 어차피 얼굴 못보고 사는 건 마찬가지여. 자식 있어도 다 혼자 사는 요즘 세상에, 전화 없으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생각하는 거지".

당차게 말하는 길 할머니 덕에 오히려 쓸쓸하게만 보이던 노인들의 입가 주름이 한결 펴졌다.

◈ "설이라고 다를 것 있나"…'최소한'의 삶에 익숙해진 독거노인들

 

사실 독거노인들에게 설날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늘 혼자 지내온 노인들에게 명절은 매일 똑같은 나날 중 하루일뿐이다.

"설이라고 특별히 다를 것도 없어요. 혼자 있으니까…"

채진수(70.가명) 할아버지 역시 혼자 지내는 게 습관이 돼서 명절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나간다.

채 할아버지는 지난 2년간 대장암으로 수술만 4번을 받고서 대장을 다 잘라냈다. 병을 얻기 전에는 주차관리원으로 일도 했지만 이제는 나라에서 나오는 기초수급비로만 살고 있다.

"혼자 있다가 어떻게 잘못될까봐…그거 하나 말고는 다 괜찮아요."

가족들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며 조용히 함구하는 채 할아버지의 침대 옆에는 조그만 가족사진이 붙어 있었다.

3년째 독거노인에게 반찬을 배달 중인 사회복지사 이민동(31) 씨는 "명절 때가 되면 뉴스나 신문에서 어르신들 이야기를 많이 하고, 봉사하는 모습도 보여주지만 현실적으로 어르신들에게 크게 적용되는 이야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반찬 배달 봉사라고 해도 고작 1주일에 두어 번. 결국 그 밖의 시간은 또 외롭게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독거노인들을 지속적으로 보살필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은 여전히 너무도 미흡한 형편이다.

아름다운 재단 배분사업팀 함영필 간사는 "복지서비스가 공급자 위주에서 받는 사람 중심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아직도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국 배달을 시작한 계기도 그랬다. 지자체에서 독거노인에게 제공하는 밑반찬이 겨울이면 너무 딱딱해져서 노인들 치아에 좋지 않아 국을 포함하기로 한 것.

함 간사는 "받는 이들이 뭘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파악해서 깊이 케어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면서 "'독거노인들은 집에 있으니 밥 갖다 주고 봉사자들이 방문하면 되겠다'는 식의 패러다임부터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 집에 배달을 마치고 복지관으로 돌아가는 길, 이 씨는 설 명절을 앞둔 훈훈한 봉사 이야기보다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르신들 생활은 솔직히 나아지지 않아요. 악화되면 악화되죠. 3년 동안 같은 분들 만나면서 사회복지사로서 제 한계점을 정말 많이 느껴요. 도움은 많이 드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까. 어르신들은 '복지관 때문에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얘기를 많이 하시지만, 그 얘길 들을 때마다 한편으로 너무 안타깝습니다. 거기까지밖에 지원을 못해 드리고 있으니까요".

 

 

2014-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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