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관을 드나들던 길 할머니가 '일자리 어르신'으로 채용된 지도 이제 2년째다. 독거노인들에게 국 배달 봉사를 하면서 한 달에 20만 원 급여를 받는다.
60대까지도 아이 돌보미 일을 하며 활동적으로 살았던 길 할머니. 그러나 2년 전 누구보다 건강했던 남편이 별안간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부터 일을 그만뒀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점점 맥이 빠졌다. 아랫집에 아들 내외가 살지만, 사실상 1주일에 한 번 얼굴을 보기도 힘들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가족 없이 홀로 사는 동년배 노인들을 찾아 반찬을 배달하기로 했다.
"자식이 있어도 다 혼자 사는 세상이지. 가족이 있든 없든 우리 다 똑같은 거예요."
길 할머니와 함께 첫 번째로 찾은 집은 정상범(73.가명) 할아버지가 사는 중화동의 작은 지하방.
방바닥을 밟자마자 발에 차가운 기운이 전해졌다. 볕 안 드는 한 칸 방 안에는 오래된 전기담요 한 장이 깔려 있었다.
사회복지사 오승미(29) 씨는 "복지관에서 난방비를 지원한다고 해도, 일반 가정의 1/10 수준인 1만 원대로 나오는 집이 허다하다"고 귀띔했다.
최저생계비로는 한 달에 단돈 몇천 원도 더 쓰기 어렵다는 걸 잘 아는 노인들이 아예 난방을 때지 않아서다.
"명절에 아드님, 따님 안 오세요?" 길 할머니가 묻자, 정 할아버지는 조용히 벽을 가리키며 "큰아들만 하나 남았는데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 한 통도 없다"고 한다.
누렇게 뜬 벽에는 젊은 남자 사진이 걸려있었다. 20년 전 '아버지, 몇 년 동안 돈 많이 벌어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선 뒤 소식이 끊긴 둘째 아들이다.
길 할머니와 정 할아버지는 이웃사촌지간이다. 두 사람 모두 칠십 평생에 부모님 세대까지 더해, 대대손손 노원구와 도봉구 등지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길 할머니가 "할아버지 누님이 토끼띠면 나랑 한 살 차이니까 초등학교 때 마을 동무였을 거여"라며 깔깔 웃자, 웃음기 없던 정 할아버지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정 할아버지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살뜰하게 챙기는 것도 길 할머니의 몫이다. 정 할아버지는 4년 전 과일을 따러 올랐던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허리뼈 4개를 부러뜨렸다.
"이 나이가 되니 4년이 지나도 뼈가 안 붙어, 진이 안 나오니까" 철심을 박는 수술을 했는데도 완치가 안 됐다. 발가락은 흉하게 굽어 버렸다.
"뭣하러 나무에는 올라가셔서 그래 그러게" 정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할아버지 발을 세심히 들여다보고 최근에 더 안 좋아지는 데는 없는지 살펴봤다.
설날 특식이라고, 이날은 따뜻한 들깨버섯국에 떡국 떡과 만두가 함께 배달됐다.
"꼭 떡이랑 만두 넣고서 맛있게 끓여 진지 잡수시라"고 재차 말하는 길 할머니에게 정 할아버지는 또 "맨날 고생이네…"라고 화답했다.
이정미(87.가명) 할머니도 길 할머니의 방문 대상자다.
지난번 '복지재단 시설로 들어가야 할까 보다'라며 걱정하는 이 할머니에게, 길 할머니는 "아주머니, 혼자서 진지 꺼내서 못 잡수시게 되면 그 때 들어가시라"고 말했다.
"아주머니나 우리나, 몸 못쓰게 되면 언젠가 들어가야 할 곳"이라고 말해준 길 할머니 덕에 이 할머니는 한결 맘이 편해졌단다. 가족들에게 짐이 되기 싫으면서도 시설행을 권한 딸에겐 내심 섭섭한 맘이 들었었다.
길 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자식의 부양이 당연한 시대가 아니라고 말한다. 가족 없는 노인이라고 불행한 노년의 표상이 될 건 결코 아니라는 것.
"자식이 한 동네에 살든 미국에 살든, 어차피 얼굴 못보고 사는 건 마찬가지여. 자식 있어도 다 혼자 사는 요즘 세상에, 전화 없으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생각하는 거지".
당차게 말하는 길 할머니 덕에 오히려 쓸쓸하게만 보이던 노인들의 입가 주름이 한결 펴졌다.
◈ "설이라고 다를 것 있나"…'최소한'의 삶에 익숙해진 독거노인들
사실 독거노인들에게 설날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늘 혼자 지내온 노인들에게 명절은 매일 똑같은 나날 중 하루일뿐이다.
마지막 집에 배달을 마치고 복지관으로 돌아가는 길, 이 씨는 설 명절을 앞둔 훈훈한 봉사 이야기보다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르신들 생활은 솔직히 나아지지 않아요. 악화되면 악화되죠. 3년 동안 같은 분들 만나면서 사회복지사로서 제 한계점을 정말 많이 느껴요. 도움은 많이 드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까. 어르신들은 '복지관 때문에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얘기를 많이 하시지만, 그 얘길 들을 때마다 한편으로 너무 안타깝습니다. 거기까지밖에 지원을 못해 드리고 있으니까요".
2014-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