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판만 더 하면'…'마성'의 경륜

 

'한 판만 더 걸면 본전을 찾을 수 있는데…'.

도박 체험기를 위해 인생 처음으로 경륜 장외발매소에 찾아 3판에 돈을 건 뒤 기자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이었다.

◈ 머리털 나고 처음 찾아간 경륜 장외발매소

지난 6일, 서울 송파구의 한 경륜 장외발매소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올림픽공원 내 사이클벨로드롬에 위치한 이곳은 일부러 알고 찾지 않는 이상 장외발매소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어려웠다.

교통카드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장외발매소는 불과 담장 차이 하나였지만 바깥 세상과는 공기조차 달랐다.

시민들이 한가롭게 산책을 다니던 올림픽공원의 여유로운 공기는 어느새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일단 발매소 내부를 한 바퀴 둘러봤다. 야외든 실내든 어느 곳이든 공간이 있는 곳이라면 배당률 현황과 경륜 경기 중계를 내보내는 모니터가 빼곡하게 설치돼 있었다.

발매장 건물 내부와 외부를 가득 메운 참가자들의 대부분은 어두운색의 외투로 몸을 감싼 채 흐린 눈빛으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떡진 머리와 퀭한 안색은 무엇인가에 단단히 중독됐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 생애 첫 경륜, 1.6배 적중! 하지만 '적자'

기자에게 주어진 '밑천'은 3만 원이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일단 돈을 걸어보기로 했다.

모니터에서는 어지럽게 배당률 숫자가 시시각각 변해갔다. 돈을 거는 OMR카드를 들고 모니터를 바라봐도 어디에 돈을 걸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모니터에서는 마감시간이 초단위로 흐르고 있었다. 마감시간이 지나면 돈을 걸려고 해도 걸 수가 없었다.

어느새 초조한 마음이 들어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안전 위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가장 배당률이 낮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우승할 확률이 높다는 의미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6번 선수에게 단승식(1등 적중 방식) 3000원 한 게임과 6번 선수로 시작하는 복승식(순서 상관없이 1-2등을 적중하는 방식) 두 게임에 각각 3000원, 4000원, 모두 1만 원을 걸었다.

이윽고 경기가 시작됐다. 광명 경륜경기장에서 열리는 경기가 생중계되는 모니터를 모두가 숨죽이고 바라봤다.

점차 분위기는 고조되고,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 톤이 올라갈수록 참가자들의 목소리도 따라 올라갔다.

특히 승부가 결정되는 마지막 코너에서는 자신이 돈을 건 선수의 번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기자도 어느새 돈을 건 6번 선수가 앞으로 치고 나갈 것을 간절히 빌고 있었다.

결승선 직전, 선수들은 기를 쓰고 마지막 스퍼트로 치고 나가 순위가 대거 바뀌었다.

모니터에 뜬 순위표를 보고 믿을 수가 없었다. 기자가 3000원을 건 6번 선수가 당당히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배당률은 1.6배. 6번 선수에게 단식으로 3000원을 걸었기에 4800원을 땄다.

하지만 이 희열은 곧 쓰라린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나머지 두 게임에 걸었던 7000원은 단 한 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졌다.

◈ 본전 생각에 '몰빵'했지만…

이대로는 결국 돈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손에 든 무엇인가에 코를 박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경기정보를 꼼꼼하게 적어 놓은 이른바 '정보지'였다. 이 정보지는 각 경기의 내용을 상세하게 분석해 예상 우승 선수까지 적어놨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선수분석이었다. 해당 선수의 신체 조건과 함께 나이, 고향, 경륜 입문 기수뿐 아니라 최근 장염에 걸려 고생했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모두 분석돼 있었다.

정보지를 자세히 읽고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보지에서 우승 후보로 찍어 놓은 선수가 반드시 우승할 것만 같았다.

역시 우승 확률이 높은 이 선수의 배당률은 낮았다. 모니터 배당률 표에는 가장 배당률이 낮은 선수, 즉 우승 확률이 높은 선수의 배당률은 마치 자신에게 돈을 걸라는 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본전 생각이 나 이 선수에게 단식으로 앞 경기에서 딴 4800원에 1만 원을 더해 모두 1만 4800원을 '몰빵'했다.

이 판단이 '오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피 같은 1만 4800원은 한 번의 흥분과 스릴로 모두 날아갔다.

◈ 고수에게 들은 조언 "뭘 하려고 해!"

불과 두 경기였지만 절반의 성공과 처절한 실패. 의기소침해졌다. '고수'에게 조언을 듣기로 했다.

발매소 밖 흡연소에는 경기 사이에 담배를 피려 나온 참가자로 가득했다.

담배를 들고 있던 40대 여성에게 접근해 오늘이 처음이라고 고백했다.

"뭘 하려고 해! 내가 처음이라니까 알려주는 거야. 오늘은 왔으니까 몇 만 원만 가지고 놀고 얼른 나가. 뒤돌아보지 말고".

6년 전 처음 경륜에 발을 들인 그는 "여기에 있는 사람 모두 집 한두 채씩은 말아먹은 사람들"이라며 "이건 무조건 지는 게임이지만 들어가면 나오지도 못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삼복식'을 추천했다. 1~3등을 순위에 상관 없이 맞추는 방식이다.

"내가 삼복식으로 몇 배 맞췄느냐면 800배가 터진 거야. 2000원 걸고 160만 원 딴 거지. 조금 가더라도 중배당으로 돈을 거는 게 더 낫지."

앞 경기에서 제일 낮은 배당에 돈을 건 기자의 전략도 "그러다 망조 든다"며 처절하게 비판 당했다.

'꾼'들 사이에서는 제일 낮은 배당률을 '빤짝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대화를 듣고 있던 50대 남성은 "3년 전 딱 한 경주를 남겨두고 157만 원을 땄는데 욕심이 났다"면서 "무조건 1등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빤짝이' 기수에게 2.4배 배당률로 돈을 걸었지만 결국 안 들어왔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 7.8배 적중, 떨치기 힘든 희열과 중독

이제 기자에게 남은 밑천은 1만 원이었다. 이 1만 원을 가지고 단 한 판으로 결판을 내기로 결정했다.

 

고수들의 조언과 정보지를 종합해 삼복식으로 네 게임을 걸었다.

거짓말처럼 삼복식 네 게임 가운데 2800원을 건 한 게임이 적중했다. 전광판에 뜬 배당률은 무려 7.8배. 1만 원을 걸어 결국 2만 원이 넘는 돈을 손에 쥐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쾌감의 둑이 터진 듯 몸 구석구석까지 짜릿함이 흘러들었다. '100원이라도 더 걸 걸'이라는 아쉬움도 동시에 밀려왔다.

3경기에서 2판까지 돈을 날렸으나 셋째 판에서 본전의 60%까지 복구했다. 한 판만 더 하면 본전은 물론 돈을 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 순간 울리는 벨소리. 취재를 마치라는 데스크의 지시였다. "딱 한 판만 더 하면 본전을 찾을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다 멈췄다. '아, 지금 취재 중이었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장외발매소를 나오자 흥분은 가라앉고 얼마나 위험한 생각을 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데스크의 벨소리가 울리지 않았다면 모든 돈을 날렸겠지'.

하지만 7.8배 적중으로 돈을 딴 마지막 판의 희열은 쉽게 떨치기 힘들었다. 고작 7.8배가 이럴진대, 수백 배가 맞으면 절대로 그 희열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중독의 시작은 바로 이런 것이리라.

 

 

201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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