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창하려다" 남산에서 털리는 '코리안 드림'


"그냥 심심해서 온 거다".

평일 오후 서울 남대문구의 한 호텔 카지노 앞에서 만난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얘기했다.

점심시간 무렵 호텔 뒤편 주차장 입구. 이 주차장 안 지하 통로는 호텔 카지노와 연결돼 있다. 해가 중천에 뜬 이른 시간이었지만, 카지노를 찾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대낮에도 이 주변에 나타났다.

정오를 넘길 무렵 두어 시간 만에 20여 명이 눈에 띄었다. 허름한 점퍼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은 이들은 주차장 안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대부분 중국인이나 동남아시아 계열로 보이는 이들이었다.

호텔 인근 공영주차장에서 근무하는 박모 씨는 "모습이 꺼칠하고 중국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들려오면 (외국인 노동자가) 카지노 왔나보다 한다"고 말했다.

박 씨에 따르면 이들은 아침이고 낮이고 시도 때도 없이 온다. 박 씨와 인사를 나누는 단골손님이 있을 정도다.

얼핏 40대로 보이는 조선족 남성은 거의 매일 저녁 7시쯤 카지노에 출근 도장을 찍으면서 박 씨와 안면을 텄다. 치아상태가 좋지 않아 이가 빠져있는 그에게 "이런 데 올 거면 이나 새로 하라"고 걱정 어린 충고도 한 적이 있다.

◈주말이면 서울역 기차 내려 남산 언덕 오르는 외국인 노동자들

카지노를 찾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주말이면 경기도 등 지방에서 서울역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남산 언덕을 올라 카지노로 향하기 위해서다.

대부분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근로자로 일하는 이들이 받는 일당은 고작 10여만 원.

이날 카지노에서 만난 A씨는 "2~3일 일하면 하루 놀 돈이 생긴다"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찾을 뿐이고 소액만 베팅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면 모두가 나직하게 내뱉는 말이 있다. "카지노는 중독성 때문에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 와서 착실하게 돈을 모으려는 청운의 꿈을 가졌던 이들도, 한 번에 무너지는 곳이 바로 카지노라는 얘기다.

이날 만난 중국 흑룡강성 출신 노모(44) 씨는 3년여 전 한국에 왔다. 고향에 두고 온 11살, 3살 아이들을 생각하며 고군분투했다.

그러다 동료들과 어울려 우연히 마작을 하게 됐다. 중국에서는 일상적으로 하던 놀이, 남는 시간에 별다른 취미나 놀 거리가 없어서 어울리다 보니 금세 3000만 원을 챙겼다.

그랬던 노 씨에게 지인으로부터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워커힐 호텔의 카지노에 가면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카지노에 발을 들인 첫날은 게임 규칙도 잘 몰라 돈을 조금 잃었다. 하지만 며칠 만에 금세 방법을 깨우쳐 돈을 따기 시작했다.

◈"잃은 돈 되찾으려" 일당 들고 찾아보지만…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노 씨는 한 번 질 때마다 이를 만회하려 계속 게임을 했다. 결국 사흘만에 수중에 있던 4000만 원을 몽땅 잃었다.

노 씨는 "지금도 그 때 밑졌던 돈을 봉창하기 위해 카지노에 온다"고 했다. 봉창이란 잃은 돈을 만회하는 걸 뜻한다.

카지노에서 잃은 돈을 되찾기 위해 다시 카지노를 찾는 역설이 반복된다. 대신 뼈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에 결코 큰 돈을 걸지 않고 30만 원을 한도로 정해 게임을 한다.

노 씨는 아이들 사진을 꺼내어 보여주면서 "가족들에게 부칠 돈 만큼은 절대 잃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도 아내에게는 카지노를 다니다 재산을 잃은 사실을 털어놓진 못했다.

서울 시내에 외국인 출입이 가능한 카지노는 3곳. 중구 힐튼호텔과 강남구 코엑스 세븐럭카지노, 광진구 워커힐 카지노다.

힐튼호텔 카지노는 세 곳 중 규모도 매출액도 가장 작지만, 입장객은 91만 명으로 가장 많다. 워커힐은 43만 명, 코엑스는 39만 명이다. 소액으로 배팅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많아서다.

서울의 카지노를 찾는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해외로 원정을 가는 한국인들도 많다.

회사원 박모(31) 씨는 지난 2010년부터 2년 동안 마카오 호텔 카지노에 무려 26번을 방문했다. 박 씨가 카지노에 쏟아 부은 돈은 7억여 원. 박 씨는 상습도박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겉으론 '봉창' 내세우지만…사실은 '중독'

전문가들은 소액으로 시작하는 해외 원정도박의 부작용이 클 수 있다고 지적한다. 장기적으로 도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수 있고 외화 낭비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가 2010년 마카오와 필리핀 카지노를 방문한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 가운데 30%는 300만~3000만 원까지의 예산을 걸고 게임을 한다고 답했다. 해외 관광 겸 카지노에 가겠다고 답한 비율도 70%나 됐다.

카지노 방문 목적에 대해 "돈을 따기 위해서"라고 답한 비율도 전체의 2/3나 됐고, "잃은 돈을 만회하기 위해서"라고 답한 비율은 1/3을 차지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카지노를 자주 찾다보면 중독 위험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남산에서 만난 외국인 노동자들도 카지노에 대해 "9번 따도 1번 잃으면 패가망신 하는 곳"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곳을 끊지 못해, 주말이면 또다시 얼마 안 되는 일당을 손에 들고 남산을 오른다. 겉으로는 '봉창'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서서히 중독돼가고 있다는 얘기다.

 

 

2013-12-19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