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억도 순식간에"…'강원랜드의 힘'

 

 

첩첩산중에 홀로 뻗은 국도를 따라 나타난 사북리에는 수십 개의 전당포에 맡겨진 고급차만 가득하다.

지나는 사람은커녕 개 짖는 소리조차 없는 조용한 동네에 점점이 박힌 허름한 식당과 모텔, 속옷 가게를 지나면 저 멀리 화려한 강원랜드 건물이 나타난다.

평일 오전에 찾은 강원랜드는 뜻밖에 한산했지만 입장권 판매대 위로 표시된 입장자 수는 벌써 3000명에 육박했다. 하루 입장객은 보통 7000~8000명 안팎. 이들은 벌써 개장시각인 오전 10시부터 몰려들어갔다.

거대한 강원랜드 건물에 비해 카지노 입구는 의외로 작았다. 건물 한쪽 구석에 직원 10여 명이 지키는 입구에는 별다른 장식도 없이 금속탐지기 3대만 놓여있다.

하지만 입구만 들어서도 천정에 촘촘히 박힌 감시용 CCTV의 은하수 아래 수백 수천의 슬롯머신 바다가 굉음을 내며 손님을 맞이한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한 사람이 하나의 슬롯머신만 사용할 수 있지만 간혹 감시의 눈길을 피해 두세 대를 함께 쓰는 경우도 눈에 띈다. 물 빠진 나일론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슬롯머신 앞에 눕다시피 앉아있던 40대 여성 A씨는 기자가 말을 걸어도 화면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A씨는 "10년 전에는 화투장이나 동전을 버튼에 끼워두고 혼자 5대씩 돌렸다"면서도 "기계는 요령을 쓸 틈도 없어서 혼자 3대 돌리면 3배 빨리 잃는다. 도박할 테이블에 자리가 없어서 심심한 사람들 지갑을 털어가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앉게 된다"고 귀띔했다.

벽을 따라 슬롯머신이 늘어선 가운데 카지노 중앙에는 테이블 게임을 하려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다. 한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인원은 7명이지만 도박하려는 사람은 많아서 '사이드베팅'을 하느라 테이블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가장 인기 있는 도박은 역시 바카라. 판돈이 커지는 5층에는 아예 슬롯머신 없이 바카라와 블랙잭 테이블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로비에서 게임안내원은 "딜러와 싸우는 게임이 아닌데다 게임 방법도 가장 간단하다"며 추천했지만, 바카라는 승률도 낮고 중독성도 강해 '도박의 꽃'으로 불리는 위험한 도박이다.

규칙이 간단한 만큼 한 판도 금방 끝난다. 기계처럼 정확한 딜러의 손길에 따고 잃은 칩이 분주히 오간다.

"제길, 벌써 칩 다 날렸네" 지갑에서 나온 5만 원짜리 지폐 다발은 한 웅큼도 되지 않는 작은 '누렁이' 칩들로 바뀌어 다시 도박꾼의 손에 쥐어진다.

테이블에 앉지 못한 사람들이 던지는 칩이 사방에서 날아든다. 가장 확률이 낮은 무승부 칸에도 8배 배당이라는 한탕의 꿈을 노린 칩들이 쌓여간다. 딜러가 쌓인 칩을 정리하고 카드를 내기 시작하자 껌 씹는 소리,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칩끼리 부딪치는 소리만 요란하다.

이번 판은 '플레이어'쪽 카드가 이겼다. 곳곳에서 탄식과 욕설이 터져 나오는 것도 잠시, 다음 승부를 계산하기 위해 각자 가지고 온 모눈종이표 중 '플레이어'칸에 색을 칠하느라 바쁘다.

이렇게 도박에 빠져있다 보면 카지노가 폐장할 때까지 밖으로 나갈 틈이 없다. 카지노가 무료로 주는 음료수로 끼니를 달래는 이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휴식처는 아쉬움을 담배 연기에 날려보낼 흡연실뿐이다.

◈강원랜드 떠나지 못하는 '앵벌이 인생들'

카지노를 나서는 이들의 손에는 도박한 만큼 포인트가 적립되는 '하이원 카드'가 있다. '콤프'로도 불리는 이 포인트는 강원랜드와 근처 가게에서 상품권처럼 사용할 수 있다.

도박으로 돈을 날릴수록 쌓여가는 '콤프'로 숙식을 해결하면서 강원랜드 근처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마지막 단물까지 빨리기 마련이다.

사북리의 한 편의점 주인은 "매달 1일 가게당 '콤프' 할당량으로 300만 원씩 받는데 사람들이 워낙 많이 써서 2일 오전이면 한도가 채워진다"며 "사북리 외곽으로 가야 콤프 포인트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원랜드에서 돈을 잃고 사북리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앵벌이'라고 부른다. 직장도 사업도 모두 잃고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끌어쓰고 나면 돌아갈 길이 막막해 이곳에 눌러앉는다.

사북리의 한 식당에서 일하는 B씨는 10년 전만 해도 인천에 건물 2채와 번듯한 아파트를 가진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 사모님이었다.

"양복재단사인 남편과 함께 세탁소에 당구장, 식당까지 15년 동안 안 해본 고생이 없었다"던 B씨에게 도박의 유혹이 다가왔다.

10여 년 전 강원랜드 카지노에 처음 발을 들인 뒤로 블랙잭 한 판에 30만 원씩 베팅하기를 5년여.

B씨는 "하루에 9000만 원을 날리기도, 5000만 원을 따보기도 했다"며 "정신을 차려보니 건물과 집을 모두 날리고 잃은 돈만 20억 원이 넘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B씨는 "난 카드빚 1억여 원 말고 큰 빚은 없으니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한 중소기업 사장이 빚 5억 원을 갚겠다며 2억 원을 빌려왔더라"며 "그 돈을 다 잃자 다음 날 아침 카지노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고 담담히 말했다.

"옛날 생각만 하면 진짜 살고 싶지도 않다. 아들 제대할 무렵 재산을 다 날리고 이혼도장을 찍어야 했다"던 B씨는 "이곳을 한 번 구경만 해도 또 오게 된다. 오면 무조건 모두 잃는다"며 강원랜드를 찾지 말라고 강조했다.

강원랜드 뒤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50대 남성 C씨도 앵벌이 출신이다. C씨는 "8년 전 하루 만에 2400만 원을 날렸다"며 "장사밑천에 직원 월급 줄 돈까지 다 날려서 자살까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간 C씨는 "아버지에 누나, 동생에까지 손을 벌려 간신히 버텼다"면서 "그러고도 1년 만에 카지노를 찾아 재산을 날리고 3개월 동안 사북리를 떠돌며 앵벌이로 지냈다"고 털어놨다.

지금도 주말마다 강원랜드를 찾는다는 C씨는 "평일은 기차 시간 때문에 초조해서 잘 오지 않는데 일하면서 자꾸 생각이 나서 왔다"며 "바카라로 잘만 따면 하루 500만 원 던지는 건 일도 아닌데, 오늘은 욕심부리다 100여만 원 정도 날렸다. 재미로만 해야 하는데…"라며 웃었다.

 

◈돈만 되면 무엇이든 삼키는 강원랜드의 밤

강원랜드에 붙들린 인생의 마지막 덫은 전당포다. 마을 전당포 주인 부부는 "결혼자금 5000만 원을 하루만에 날렸다"는 기자의 말에 눈도 깜짝하지 않은 채 "카드, 콤프, 차, 귀금속 무엇이든 돈만 되면 '깡'을 해줄 수 있다"고 유혹했다.

전당포 주인 부부는 "받은 차를 돈 받고 빌려줘서 수익을 내지만, 빌려 간 사람이 사고를 내도 보험처리가 된다"며 "이자만 제때 갚으면 차는 팔지 않겠다"고 안심시켰다.

아무리 고급차라도 중고차 시세의 반도 되지 않는 돈만 내어준다. 여기에 열흘마다 단리 10%를 붙이고 선이자까지 떼지만 본전 생각이 간절한 이들에게는 조건을 따질 겨를이 없다.

전당포 뒤에는 너무 오래돼 대여조차 못해 주인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차량 30여 대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주차돼 있었다.

대박의 꿈으로 하루를 하얗게 샌 강원랜드의 하루는 새벽 6시 폐장시간에 끝난다. 강원랜드 출입구에는 도박꾼들을 찜질방으로 실어나를 승합차가 모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강원랜드 호텔을 찾았던 이들도 돈을 잃으면서 점차 모텔로, 찜질방으로 숙박을 옮겨간다. 벌써 한 달에 15일씩 제한된 출입횟수를 다 쓴 이들은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을 돈 주고 빌려 다음날 몰래 입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게 문에 붙어있던 '콤프 가능'이라는 쪽지가 하나 둘 '콤프 만료'로 바뀌었다. 성인용 PC방 앞에는 5만 원짜리 바둑이를 치려는 사람들이 지갑을 열고 돈을 헤아리고 있었다.

새벽 6시부터 오전 10시. 강원랜드의 짧은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201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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