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마다 경마장" 백발 할머니들의 '똥 꿈'

◈한 눈에 알 수 있는 '마쟁이' 가득한 과천 경마장
 


지난 7일 복잡한 서울 도심에서 벗어난 지하철 4호선 경마공원. 경마공원은 넓은 녹지로 시민들의 나들이나 데이트 장소로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공원에서 조금만 길을 따라 경마장 건물로 들어가면 긴장되고 경직된 기운이 흐른다.

데이트 커플이나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이 드문드문 보이지만 한 눈빛에 초조한 발걸음으로 경마장을 서성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한 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은 이른바 '마쟁이'라 불리는 경마 중독자들이다.

이들의 초조함은 경마 시작 시간이 다가올수록 극에 달한다. 돈을 걸기 위해 작성하는 OMR 카드를 가지러 가는 시간도 아까워 뭉텅이로 들고 다니는 이들은 시시각각 바뀌는 배당률 현황판에 눈을 떼지 못한다.

◈승부 결정되면 대부분 '탄식'…마지막 코너부터 욕망 들끓어

경주마들이 출발선에서 폭발적으로 내달리며 경주가 시작되면 일단 고요한 분위기가 경마장 전체를 감싼다.

점차 분위기는 고조되고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 톤이 올라가면서 마쟁이들도 따라 흥분하기 시작한다.

"3번마! 3번마! 4번마 치고 나갑니다! 4번마! 아 5번마가 따라잡습니다! 5번마!".

특히 승부가 결정되는 마지막 코너부터 점차 빨라지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마쟁이들도 자신들이 돈을 건 말들의 번호를 저도 모르게 외친다.

"3번 5번! 그래 3번 5번! 그래! 아니! 안 돼! 그게 아냐! 아이 XX!".

승부가 결정되면 환희의 비명을 지르는 이들을 찾아보기는 어려웠고 대부분은 긴 탄식을 내뱉었다.

◈"내가 954배도 찍어봤다"…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든 '돈맛'

지난 7일 경기도 과천 셔울경마공원 경마장에서 경마 참가자들이 말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사진=김민재 기자)

지난 7일 경기도 과천 셔울경마공원 경마장에서 경마 참가자들이 말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사진=김민재 기자)

이들은 단 한 번에 끝나는 승부에 중독돼 벗어날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인천에서 온 40대 남성은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경기 결과를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천만 원 잃어본 적이 있지만 한 번만 맞으면 본전 찾는 게임"이라면서 "많이 딸 때는 2만 원을 걸었는데 954.5배가 맞아 1900만 원을 땄다"고 안광을 빛냈다.

그는 "오늘도 10만 원 잃었다"면서도 "딴 곳에 가서 놀아도 다 돈은 들지 않겠냐"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똥 꿈 꾸면 꼭 경마장에 와야 해. 전에도 똥 꿈 꾼 날 7000원 넣고 200만 원 땄어".

A(63) 할머니는 허름한 검은 트레이닝 복에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초점이 흐린 눈빛으로 주문처럼 되뇌였다.

A 할머니는 도저히 이 중독의 굴레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병든 사람처럼 있다가 금요일(경마 시작일)이 되면 오지. 중독자야. 나도 한 10년 된 중독자"라고 한탄했다.

◈'순도 100% 중독자' 모이는 장외발매소…가족들에도 '극비'

지난 6일 낮, 평일 낮 시간이지만 서울 송파구의 한 장외발매소에는 경륜에 돈을 거는 이들 수천 명으로 성황을 이뤘다.(사진=이대희 기자)

지난 6일 낮, 평일 낮 시간이지만 서울 송파구의 한 장외발매소에는 경륜에 돈을 거는 이들 수천 명으로 성황을 이뤘다.(사진=이대희 기자)

그나마 과천 경마장은 실외인 데다, 중독자들이 아닌 일반인들도 섞여 있어 분위기는 나은 편이다.

경마장이 아닌 전국 30여 곳에 있는 장외발매소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병적'이었다.

서울 송파구 올림픽 공원 한 가운데 있는 장외발매소에는 평일 낮인데도 경륜에 돈을 거는 이들 수천 명으로 성황을 이뤘다.

어디로 발걸음을 내딛든 경기 화면과 배당률을 보여주는 LCD 화면과 무인발매기로 가득했다.

오로지 돈을 걸기 위해 모인 이들은 별다른 말이 없어도 서로의 처지를 잘 아는 듯했다.

"뭘 하려고 해! 내가 처음이라니까 알려주는 거야. 오늘은 왔으니까 몇 만 원만 가지고 놀고 얼른 나가. 뒤돌아보지 말고".

장외발매소에 처음 온 '초보 중독자'로 가장한 취재진이 도박 비법을 묻자, 한 40대 여성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충고했다.

그녀는 6년 전 장외발매소에 친구의 제안으로 처음 발을 들였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경마에 망조가 들어 이혼한 친구'였다.

그녀는 "여기에 있는 사람 모두 집 한두 채씩은 말아먹은 사람들"이라며 "이건 무조건 지는 게임이지만 들어가면 나오지도 못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화를 듣고 있던 50대 남성도 가세했다. 그는 "3년 전 딱 한 경주를 남겨두고 157만 원을 땄는데 욕심이 났다"면서 "무조건 1등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기수에게 2.4배 배당률로 돈을 걸었지만 결국 안 들어왔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는 "더 거지가 되는 지름길은 '소스'에 귀 기울이는 것"이라면서 "확실한 정보라며 '카더라'에 관심을 갖는 순간 무리해서 돈을 끌어모으게 되고 결국 다 날려 빚더미에 앉는다"고 경고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도박 중독의 늪에 빠진 사실을 알면서도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말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한 70대 할머니는 "자식들도 다 몰라. 알면 좋겠나. 알면 불량 엄마지. 친구들과 칼국수 먹으러 간다고 얘기하고 나온다"면서 "잘못된 걸 알면서도 끊을 수 없다"고 입맛을 다셨다.

 

20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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